[속도 경쟁]
-速度竞争
어제 산촌다람쥐 주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 6박 7일, 길게는 9박 10일 일정으로 다녀오는 ABC 트래킹을 2박 3일만에 끝내고 돌아온 한국인 두 남자 이야기다.
흔히 있는 속도 경쟁이다.
유달리 한국 사람들에는 익숙하고, 당연히 그래야만하는 혹은 그럴 수 있는 기묘한 경쟁이다.
그리고 승자인 그들의 이야기는 누군가 더 빠른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 일종의 전설(?)처럼 남아 속도 경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목표의식이 될 것이다.
'야- 우리도 ABC왕복 4박 5일, 아니 그보다 더 빨리 끊어볼까?'
하지만 난 그게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그 곳은 한국에 존재하지도 않는 해발고도 4천 미터 지점이다.
끝까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안나푸르나의 끝은 8천 미터가 넘는다.
그런 산을 마치 '정복'하려 하는 행위, 누가누가 빨리 다녀오나 경쟁하는 행위는 내게 별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ABC트래킹을 함께 하기로 한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이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으며, 또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한다는 설렘에 저 친구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각]
트래킹 첫째 날이 밝았다.
맘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배낭을 메고 시작 지점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ABC트래킹을 결정한 것은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미리 준비하는 입산 허가서 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ABC에 가기 위해서는 퍼밋과 TIMS가 필요한데, 이건 산촌다람쥐 사장님이 오늘 10시까지 준비해주기로 하였다.
출발은 10시 30분, 가이드북에서 말하는 출발 시간보다 대략 4시간 지각을 한 셈이다.
그렇게 우린 첫째 날부터 속도 경쟁에서 뒤진 채.
마치 지각을 한 후 머쓱하게 교실로 들어서는 학생인양 배낭을 보며 허가증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위쪽 이 입산 허가증, 아래쪽이 TIMS다]
강연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시작 지점인 나야풀로 이동한다.
택시 셰어(Taxi Share)를 한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분은 트래킹이 아닌 라운딩을 목적으로 이 곳에 왔다고 한다.
우리와 출발지점이 달라 대략 30분 전에 이름 모를 곳에서 우리와 헤어진다.
그렇게 30분 가량을 더 달려 도착한 나야풀.
11시 55분이었다.
[한적한 나야풀, 트래킹의 시발점이다.]
[우기의 안나푸르나]
우린 배낭을 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번 트래킹은 내 여행을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서쪽으로 이동하되 최대한 육로로, 쿠바는 꼭 가보기" 라는 한 줄짜리 계획으로 시작되었던 내 세계일주처럼,
"지도를 보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올라가되 고산병이 오면 멈춰 쉬기" 가 계획이었다.
닮아있다.
여행을 시작한지 3개월 째이지만, 아직 크게 바뀐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난 이런 식의 여행이 좋아 앞으로도 쉬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제 산촌다람쥐에서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는 한국인 두 남자의 2박 3일 등반기 말고,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우기의 안나푸르나 트래킹의 위험성이었다.
위험1.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거머리
사실 믿기지 않았다.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나는, 거머리가 정확하게 어떻게 생겨먹은 줄 몰랐지만 대략 엄지손가락 만한 놈이라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놈이 하늘에서 떨어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여주인에게 들키지 않게끔 코웃음을 쳤다.
정확히 알고 있는 지식은 하나, 놈은 흡혈을 하는 생명체라는 것이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금 무서웠다.
'혹시 하늘에서 거머리떼가 쏟아져 내 피를 다 빨아버리면 어쩌지..?'
그래서 강연이와 난 돈을 모아 어제 소금 한 봉지를 샀다.
흡혈을 시작한 거머리를 힘으로 떼어낼 경우 쉽지 않고, 피부가 찢어질 가능성도 있어 소금을 치덕치덕 바르면 쉽게 떼어낼 수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소금은 항상 꺼내기 쉽게 골반에 위치한 배낭의 허리 벨트 주머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위험2. 산사태 혹은 실족
이건 조금 위험해보였다.
사장님은 계속해서 비가 내리기 때문에 크고 작은 산사태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고 경고했다.
더 위험한 건 실족인데, 계속해서 내린 비로 하천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나있고 당연히 물살도 빨라 강으로 추락할 경우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여기서 우린 안전을 위해 가이드와 포터(짐꾼)을 소개받았는데, 강연이가 되물었다.
"가이드? 그거 얼만데요?"
녀석이 말하는 투나 표정을 봐서 느꼈다.
이 친구는 내 과라는 사실을.
결국 우린 가이드나 포터를 고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돈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고 주장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 편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해둔다. (고 주장한다)
위험3. 여긴 왜 올라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ABC
사실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은 이 것이었다.
'거머리와 산사태, 실족의 위험을 피해 목적지까지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때는 서로를 몰랐지만 강연이와 난 우기의 다즐링을 같은 시간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답답함을 잘 알고 있었다.
건기의 인도, 다즐링에서는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히말라야 칸첸중가가 보인다.
사진으로만 봐도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그 경관을 우린 보지 못했다.
심지어 난 일주일 가까이 그 곳에 머물렀음에도 어마어마한 비구름과 안개가 온 세상을 뒤덮어, 산등성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 안나푸르나 역시 그러하다.
우기이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가더라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
그 나름의 즐거움이 많았지만, 아쉬운 기억도 컸던 다즐링의 회상장면이 끝나기도 전에 사장님은 이 사실을 덧붙인다.
"중국에서 온 ABC팀이 있어요. 어제 포카라로 돌아왔거든요. 그 사람들 ABC까지 갔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1박을 더 했대요. 그런데 날씨가 계속 그런거야. 그래서 1박을 더 했대요. 다음날? 변한게 없었대요. 그렇게 3일을 더 보냈는데 끝까지 안개/구름만 보고 내려왔다고 하네용"
도박이었다.
그래, 난 이 친구와 함께 도박을 한 건지도 모른다.
[첫째날]
이렇게 안나푸르나의 위험을 회상하던 중
우린 12시 21분 비레탄티 TIMS 체크 포인트를 지나왔었으며,
13시 40분 시울리 바자르에 도착하여 초콜릿과 빵을 나눠먹었다.
여기서 김체로 가는 길은 온통 계단이어서 숨소리 밖에 들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계단이 많지? 라고 생각하면 또 계단이 보였으며, 이제는 끝나겠지라고 고개를 들어보면 또 계단이 보였다.
계단지옥이란게 있으면 이런 곳일까?
끝없이 걸어도 계단만 펼쳐지는 곳이 있다면 그게 계단지옥일것이라, 그런 망상과 함께 웃으며 힘을 낼 수 있었다.
아직 대학생인 젊은 강연이는 나를 앞질러 성큼성큼 걸어갔으며, 가끔 돌아보며 헉헉대는 나를 응원하기도 했다.
"에이~ 형 빨리 와요"
아무래도 트래킹 친구를 잘못 구한 듯 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찰나 김체 도착.
15시였다.
아주 노골적인 이름의 음식점을 발견했지만 아직 배는 고프지 않아, 지나친다.
[아주 노골적인 이름의 Don't Pass me Restaurant]
아주 조금 쉬고, 힘이 남아있을 때 조금 더 가보자는 생각에 다음 지도에 적혀있는 간드룩까지 가기로 결정한다.
16시 20분.
점심을 초콜릿과 빵으로 대충 먹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만한걸 찾던 중 식당이 보였다.
오믈렛 하나를 주문해서 나눠먹기로 했는데, 정말 손바닥보다 더 작은 녀석이 나왔다.
그래, 분명 이 곳까지 달걀을 가져오는게 힘들어서 그럴거야.
그렇게 착한 생각을 하고나니, 시작점인 나야풀에서 꽤나 많이 올라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건 대자연이 주는 긍정적인 기운에 나도 모르게 긍정적인 생각을 했을 뿐, 내일 조우하게 될 장면은 그 생각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이제부터 거머리가 많이 나올테니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제서야 우기 안나푸르나의 위험1번이 생각났다.
"강연아 우리 소금 어디있지?"
"형 주머니에 있잖아요~"
"아 그래, 여기있지. 이제부터 거머리 포인트래. 긴장하자."
그리고 주인이 알려준 것이 또 있다.
산을 내려오는 당나귀나 염소떼를 피하는 방법이었는데,
산 능성이 쪽으로 몸을 피해 길을 터주는 것이다.
만약 벼랑쪽으로 몸을 피한다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아주 온순하지만, 아주 가끔씩 돌발적으로 사람들을 향해 돌진한다고 한다.
[이 상황에선 왼쪽으로 피해야한다, 오른쪽은 절벽이라 부딪혔을 경우 위험!]
나는 조심스레 녀석들을 피해 콤롱을 향해 발걸음을 딛는다.
"형 저거봐요~"
강연이의 말에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지만 소가 몇 마리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응 저거 뭐?"
"등쪽 보세요 등"
소 등판을 보니 아뿔싸.
드디어 거머리와 첫 만남이었다.
꽤나 오랜시간 흡혈을 한 듯 거머리 몇 마리는 땡땡 부은 몸으로 소에게 매달려있었다.
거머리의 주 침입경로는 발쪽이라는 사실을 이미 배웠기 때문에, 우린 소금을 꺼내 신발에 소금을 덕지 덕지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출발.
우기의 트래킹이라 그런지, 분명 사람들이 없었다.
지금까지 올라왔는데 우린 하산하는 사람들만 몇 팀 만났고, ABC로 가는 사람들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인사해주었으며, 어눌하게 지명만 말해도 어느 방향이 그 곳인지 가볍게 손짓해주었다.
그렇게 우린, 친절한 네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계속해서 트래킹을 하기 시작했다.
가쁜숨을 몰아쉬며 꽤나 많이 걸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드디어 콤롱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2,600미터.
아직 둘 다 고산병 증세는 없었으며,
18시 10분이었다.
작고 아담한 이 마을에서 인당 100네팔루피 짜리 롯지(Lodge)를 구하고 신발이나 커버를 말린 후 샤워를 한다.
물론 그 전에 달밧과 볶음면을 주문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곳은 모든 것이 굉장히 느린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아까 우리가 빵을 주문했을 때도, 오믈렛을 주문했을 때도 약 30분 가까이 걸려서 준비가 되었었다.
만약 한국에서 그런 단순한 음식을 주문했는데 30분씩이나 걸린다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겠지만.
이 곳은 달랐다.
산이 내는 소리를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분명 히말라야 어느 빙하에서 녹아 쏟아지고 있을 어마어마한 물소리나 새소리,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와 동물 울음소리 등 이 모든것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눈을 감고 있어도 마냥 좋았던 것이다.
주문한 달밧과 볶음면은 어마어마한 양으로 준비되었다.
대략 6시간 동안 산행을 한 우리는 눈 깜짝할 새에 음식을 먹어치웠다.
네팔의 달밧은 리필이 가능하단 장점이 있는 음식인데, 맘 좋은 주인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달밧을 더 주려했고 우린 배가 부르다는 손짓 몸짓으로 웃으며 거절했다.
식사 후 강연이는 주인집 꼬마들과 놀아주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피곤하지도 않은걸까? 웃고 있는 나를 뒤로하고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핸드폰 게임을 켜서 꼬마들에게 주기도 했으며, 태블릿 PC에 받아온 인도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난 그 장면을 옆에서 바라봤는데 참 멋진 친구라 생각했다.
사람을 끄는 외향적 매력이 있는 친구.
그게 첫째날 트래킹을 함께 한 녀석에게 받은 강한 인상이었다.
[속도경쟁의 패배자]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결정한 ABC트래킹.
그 결정 과정에서 들었던 한국인 두 남자의 2박 3일 산행기.
속도 경쟁.
오늘 6시간의 트래킹 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역시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결정 했지만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6시간 만에 느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출발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콤롱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갔을 지도 모른다.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Hurry Up'을 외쳤을 지도 모른다.
딱히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꼬마들과 놀아주지 않고 내일을 위해 쉬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이 곳에서 멈췄으며, 음식을 차분히 기다렸으며, 귀여운 꼬마 둘과 함께 게임을 한다.
이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도 될까? 조금 두려운 걱정이 들 정도로 느린 밤이었다.
결국 온가족이 모두 모여, 작은 태블릿을 보며 함께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하루가 마무리된다.
누가 호스트인지 잊어버릴 정도로, 우린 마치 이 곳이 예전부터 살고있던 집인양 안락하고 평온한 기운에 휩싸였다.
그렇게,
우린 그렇게 속도경쟁의 패배자가 되어 함께 웃고 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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