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0 - [세계일주 여행기/◆아시아(Asia)] - (여행기/안나푸르나) ABC트래킹 결정
2017/05/11 - [세계일주 여행기/◆아시아(Asia)] - (여행기/안나푸르나) ABC트래킹 첫째 날
2017/05/18 - [세계일주 여행기/◆아시아(Asia)] - (여행기/안나푸르나) ABC트래킹 둘째 날
[밀크 티]
7시,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어제 우리가 도착한 이 히말라야 롯지(Lodge)는 해발고도 약 2,900m에 위치한 중턱이다.
이제부터 데우랄리(3,200m)를 지나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3,700m), 목적지인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130m)까지 반나절이면 올라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해발고도 3,000m 이상 구간부터는 고산병이 쉽게 올 수 있는 구간이기 때문에 긴장된 마음으로 아침을 주문했다.
오지도 않은 고산병을 섣불리 걱정하지 말되,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면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결심한다.
허겁지겁 먹은 셋째 날 아침,
달밧과 오믈렛.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음식을 먹고 남은 빈 접시 사진밖에 남아있지 않다.
후식으로 밀크티를 마셨다.
스틸 재질로 된 컵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 보니 어제보다 날씨는 좋았다.
종일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쳤으며, 어제보다 안개도 많이 사라져 시야도 꽤나 먼 곳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7시 56분, 우린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59분, 1시간 30분, 1시간]
먼저 데우랄리까지는 59분이 걸렸다.
우린 의도적으로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 어제 걷던 속도의 2/3정도를 유지했으며,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수분을 섭취했다.
목적지로 가는 날, 이곳은 지금까지 지나온 코스에 비해 순탄한 구간이 많았다.
아, 물론 이런 구간도 있다.
어제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허술한 나무 다리.
"강연아 어제처럼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 그냥 바위로 점프해"
-"형 말이 쉽지 어떻게 그래요 ㅋㅋㅋ"
어제부터 내린 비는 정상에서 서서히 녹은 만년설과 합쳐져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고 있었으며,
우리가 디딜 수 있는 이 나무다리는 어제 건너온 다리보다 더 허술해보였다.
우리 두 다리는 이미 이 곳의 땅에 적응한걸까?
이 나무 다리를 건널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운동화를 신은 내 두 발은 조금도 미끄러지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전진했으며, 어느덧 데우랄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발고도 3,200m
아직 몸 상태는 정상이었으며, 예리한 칼로 잘라낸 듯 비죽튀어나온 산 능선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3,000m를 넘어섰으니 어제 걷던 속도의 절반으로 걷기로 한다.
천천히 걷되,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면 멈춰서고, 심해지면 다시 내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곳에서는 이른 점심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전자기기를 무료로 충전할 수 있게끔 멀티탭을 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특히 물이 귀하고, 전기가 귀한 이 곳에서 무료로 충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물론 그에 수반하여 음식값이 2~3배 비싼 것은 감수 해야한다.
점심 값으로만 780네팔루피가 나왔다.
이 정도 금액이면 포카라에서 아래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멋진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미국식 아침을 먹고, 빈둥거린 후, 맛있는 점심을 먹고, 산책 후 커피 한잔을 마시면 대략 7~800루피가 든다.
하지만 이곳까지 식재료를 운반하는데 드는 비용을 계산해봤을 때,
그리고 충전 서비스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납득 가능한 금액이었다.
이제 대망의 MBC-ABC구간이다.
이 곳은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다.
천천히 야생꽃과 함께 풀을 밟으며 걸어가면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어느덧 해발고도는 4,000m를 넘어서고
안개가 자욱하게 내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천천히 걷고 있는데도 어제보다 훨씬 빨리 숨이 차오르는게 체감이 된다.
헉헉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나온다.
하지그렇게 한발씩 천천히 내딛다 보면 이런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해발고도 4,130m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도착.
이 곳에 도착하면 어마어마한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들 줄 알았는데,
저 간판 하나 서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개는 점점 자욱해져만 갔다.
우린 망연자실했지만, 이내 숙소부터 들어가서 뒷 일을 생각하기로 한다.
자욱한 안개 속의 안나푸르나 게스트하우스.
[히말라야에서 태백산맥을 읽다]
불안했다.
내 여행기와 함께 여행하고 당신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난 인도, 다즐링에서도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히말라야 제3봉인 칸첸중가(8,586m) 가 훤히 보이는 그 곳에서 일주일 넘게 기다렸지만 칸첸중가의 산 능성이 하나도 보지 못하고 내려왔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봤던 것은 어마어마한 안개와 비, 지면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 정도.
그제서야 사람들이 우기의 ABC를 잘 오르지 않으려한다는 이야기도 다시 생각났다.
불안했다.
이번에는 일주일 내내 이 곳에서 히말라야를 보기위해 묶었다던 중국인 트래킹 팀 이야기도 떠올랐다.
결국 못보고 포카라로 내려갔다지.
불안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있었다.
아직 오후 2시도 채 되지 않았으니,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난 이 곳까지 나를 안내해준 러닝슈즈를 벗고 편한 신발로 바꿔신는다.
[ABC가 4,130m라고 해서 운동화를 신고 오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좀 더러워진다]
처음 공개하지만 보통 히말라야의 롯지(Lodge)는 이렇게 생겼다.
침대가 두개있고, 끝.
4시간 전까지만해도 반팔을 입고 등반을 했었다면, 이곳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높은 해발고도가 증명하듯 기온도 훨씬 낮았으며 땀이 급속히 식기 때문에 우린 식당에서 이런 모습으로 앉아 있어야 한다.
[담요 좀 주세요 하면 저렇게 두툼한 담요를 준다]
우린 방에 누워있을 수도 있었지만, 좁고 바깥도 잘 보이지 않는 그 곳보다 트래커들이 옹기종이 모여있는 식당에서 안개가 걷힐 때 까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오후 2시
이제부터 뭘 해야할까? 고민하던 찰나, 산에 올라왔으니 태백산맥을 읽기로 결심했다.
내가 이 소설을 중학생 때 읽었던가?
아니다, 중학생 때는 아리랑이었고, 고등학생 때는 태백산맥, 한강은 대학생 때 읽었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창문 밖을 바라본다.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안개는 더더욱 그 농도를 짙게 만들어, 온 세상을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계속 태백산맥을 읽었고, 밀크티를 마셨다.
강연이는 일기를 쓰고 있었으며, 프랑스 여자 두명으로 이뤄진 팀은 담요를 둘둘 말고 독서.
국정불명의 웨스턴 커플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먹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포터와 가이드는 실망스럽게 풀이 죽어있는 우리들에게 가끔씩 농을 던지기도 했다.
어제 만났던 한국인 3명으로 이뤄진 팀은 계속해서 방에 있었는데, 아마 고산병 때문에 누워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16시였다.
2시간 내내 기후 변화는 없었다.
점점 우리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자꾸 시계를 보게 되었다.
16시 반, 17시, 17시 반.
젠장 하루가 이렇게 끝나 버릴 것 같았다.
불안해서 식당 밖을 나가 봤지만 바뀐 건 없었다.
그래.. 또 이대로 끝이구나.
아니 바뀐게 있었다.
설상 가상으로 비까지 나부끼기 시작했다.
난 아무래도 히말라야랑 인연이 없나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배가 고파졌다.
"우리 아무것도 못 보고 내려가더라도, 여기 온 김에 먹고 놀자"
그렇게 우린 자포자기한 상태로 피자를 먹었다.
냠
냠
냠
그러던 중
기적이 일어났다.
달팽이 처럼 두꺼운 담요로 온 몸을 둘둘 감고 있던 프랑스 여자가 순간적으로 담요에서 빠져나오더니 말했다.
"Look over there"
그녀는 창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진기를 들고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기적적으로 안개가 걷힌 것이다.
그 왁자지껄한 소동에 한국인 세 남자도 방에서 뛰쳐나와 그 기적을 함께 한다.
안개가 걷힌 그 곳에선 숨을 턱 멎게 만들 정도로 높고 거대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저 물고기 꼬리처럼 뾰족한 산이 마차푸차레, 그 반대편으로 안나푸르나 1봉, 2봉이 솟아있다.
온 사방으로 히말라야의 거대한 산이 보였다.
우린 정신나간 사람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숨이 헉헉 가빠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의 한 중턱에서 포효하기 시작했다.
기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20여분이 흐르자 다시 안개가 성큼성큼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로 됐다.
이미 우린 잠깐 사이에 모든 에너지를 방전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최초로 마주한 대자연은 실로 대단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이성조차 잃어버린 채 소리지를 정도로,
심장에서 온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피가 찌릿찌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정도로 엄청난 광경을 목도한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다시 이 곳은 자욱한 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분명, 무언가에 가리워져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바깥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어둠까지 가세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보이지만 않을 뿐, 아까 만났던 거대한 산은 나를 둘러싼 채 우뚝 솟아 있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어 웃는다.
시리도록 맑은 공기에 둘러싸인 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닌 그 곳에서
난 그렇게 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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