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여행기]
2017/05/10 - [세계일주 여행기/◆아시아(Asia)] - (여행기/안나푸르나) ABC트래킹 결정
2017/05/11 - [세계일주 여행기/◆아시아(Asia)] - (여행기/안나푸르나) ABC트래킹 첫째 날
2017/05/18 - [세계일주 여행기/◆아시아(Asia)] - (여행기/안나푸르나) ABC트래킹 둘째 날
2017/05/24 - [세계일주 여행기/◆아시아(Asia)] - (여행기/안나푸르나) ABC트래킹 셋째 날
[3:00 AM]
여느때처럼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본다.
여느때처럼 아침 7시 정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손목시계의 라이트(Light)버튼을 누르자, 3:00 AM이란 숫자가 밝게 빛난다.
그리고 여느때완 달리 극심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침낭에서 빠져나와 잠깐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신발을 신었다.
내가 빠져나온 침낭은 뱀의 허물인양 웅크려 자고 있었을 내 몸 윤곽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 이건 봄/가을용 침낭이지'
추웠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에 추웠고, 아마 감기에 걸려 머리가 아픈 것이리라 생각했다.
경량패딩을 가지고 여행하는 강연이에 반해, 난 딱히 보온을 위한 장비가 없었다.
해서 가지고 있는 옷을 껴입는 수 밖에 없었는데, 옷을 꺼내보니 딱히 겹쳐 입을 만한 옷조차 많지 않았다.
'이 정도 감기면 하루 이틀이면 끝나겠지'
새벽 3시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무수히 많은 별로 덮혀있었다.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고개를 쳐들고 별을 보고 있노라니, 몇 해 전 필리핀 카모테스 섬에서 봤던 어마어마한 별들이 기억났다.
별천지의 섬
그리고 내 머리에서도 별이 돈다.
'두 시간만 더 자고 일어나자. 그럼 좀 괜찮아지겠지'
[5:00 AM]
알람이 울렸다.
'지금이 다섯시구나'라는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또 다시 두통이 시작되었다.
"강연아 너 괜찮니? 나 머리 엄청 아픔"
그리고 우습게도 녀석 역시 머리가 아프다고 대답한다.
그때 우린 이 두통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고산병이었다.
하지만 우린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이제 두어시간만 지나면 산을 내려갈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고산병의 증상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이 없었지만, 고산병을 해결하는 법은 여러가지 알고있었는데,
그 중 한 가지 솔루션이 "당장, 낮은 고도로 내려갈 것" 이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거의 모든 트래커들이 잠에서 깨어나 캠프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첫 날 부터 어제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였던 비와 안개, 구름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채 히말라야 산맥은 우리와 인사를 했다.
우기의 히말라야이지만 열흘 정도에 하루쯤은 맑은 날이 찾아오기도 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이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설산은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장관이었다.
난 계속해서 어제 있었던 '기적'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받은 감동으로 치자면 어제가 훨씬.
컸었다.
사흘 내내 가리워져 보이지 않던 산이 순식간에 모습을 보이고.
20분 만에 다시 사라져버렸던 어제.
그 정도로 극적인 일은 뇌리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자 설산은 맹렬한 햇살을 그대로 반사하기 시작했다.
하얀 설경에 눈이 부셔 아침부터 선글라스를 낀 채 주변을 산책하기 시작한다.
어제 봤고 또 보고 있지만, 찌릿한 두통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절경에 홀딱 반해 좀비처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박영석 대장]
우린 아침을 주문해둔 채, 계속해서 산책을 했다.
조금이라도 더 히말라야를 눈에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어제의 경험을 통해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려 안개에 휩싸이는 건 순식간에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갑작스레 끝나버릴지 모를 광경에 조마조마 하며 계속 산책을 하던 중,
어제 프랑스 여자 두명과 함께 트래킹을 하는 포터를 만난다.
"안녕~"
"안녕, 너 한국인?"
"오, 어떻게 알았어? 내가 한국인처럼 생겼어?"
"..."
젠장, 한국인처럼 보이지는 않나보다.
아마 강연이와 함께 있는걸 봤겠지.
"팍.은.석. 알아?"
"응? 뭐라고? 다시 말해봐"
"팍.용.석?"
그리고 그때 기억을 스쳐지나가는 건 '박영석'이란 이름의 대장이었다.
내가 딱히 설명을 하지 않아도, 어쩌면 산에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그 이름이었다.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어마어마한 일화가 많이 있다.
최단기록으로 남극점도 가시고, 북극도 탐험하시고, 높은 산이란 산은 다 올라가셨는데 심지어 무산소 등정도 하셨던 분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점이라 생각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 길(Route)이 되어버린 길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
누구보다 쉽게 오를 수 있는 그 길을 버리고, 남들이 가지 않는 험로를 개척하며 산을 올랐다는 것.
그리고 그게 코리안 루트(Korean Route)라 명명한 그가 개척한 길이다.
이런 슈퍼맨 같은 남자가 2011년 겨울 안나푸르나를 오르기 시작했는데, 위험한 남벽으로 치고 오르던 중 실종 사고가 발생한다.
역시 남들이 가지 않는 길. 그의 길이 될 코리안 루트(Korean Route)를 개척하던 중 일어난 비극이었다.
그 포터는 '박영석'을 말하며 안나푸르나 2/3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마 저 쯤 어딘가, 슈퍼맨이 살고 있다는 얘기겠지.'
당신도 박영석 대장을 봤냐는 내 질문에, 산행도 수 차례 함께 해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내겐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숙연해진 모습의 내게 포터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하산]
아침을 먹고 우린 하산을 결정한다.
조금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는 전문 산악인이나 일반인들에게 이 베이스캠프는 고산에 적응하기 위한 장소일 뿐이지만,
우리에겐 처음부터 이 곳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날씨는 쾌청했다.
마치 첫날 부터 어제까진 다른 세상을 걸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이질적인 날씨였다.
쨍한 햇살과 함께 7시 29분 하산 시작.
하산은 적당한 속도로, 하지만 오를 때 보단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린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로 휘감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ABC 입간판까지 도착한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저 입간판을 세운 사람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정말 FANTASTIC한 트레킹을 하고 돌아간다.
어쩌면 누구나 각기 다른 이유로 환상을 경험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경우는 '우기'라는 환경적 특성이 크게 작용 했었고, 9월이나 10월 즈음에 이 곳을 오르는 사람은 시작부터 보이는 어마어마한 광경에 압도되어 환상을 경험할 수도 있겠다.
이대로 헤어지는게 아쉬워 뒤를 돌아본다.
DSLR을 포카라에 놔두고 온 것을 후회하는 트래킹 넷 째날 아침이었다.
하산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 만에 데우랄리에 도착한다.
난 배낭 골반 쪽 주머니에 초코바를 5개 정도 사서 넣어뒀었는데, 주머니를 뒤적거려보니 아직 2개가 남은 상태였다.
이런 건 산을 오를 때, 다시 말해 힘에 부칠 때 열심히 먹었어야 했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이루겠다고 아껴먹다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스크루지 영감 같으니라고.
아침까지 계속되던 두통은 깔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아프지도 않고, 주머니에 초콜릿도 있다.
날씨는 쾌청했으며 기온도 적당했다.
이 사진을 보고서야 왜 ABC에서 만난 그 포터가 머뭇거렸는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난 LAOS가 적힌 라오스 방문 기념 팔찌도 차고 있다.
우린 경사가 완만한 구간에선 거의 뛰듯이 내려왔는데, 이 속도 대로라면 오늘 밤은 포카라에서 보낼 수도 있을거라 생각되었다.
어제부터 사랑하게된 네팔 라면.
그리고 매 끼니마다 우리와 함께한 달밧.
둘째 날 올라갈 때는 잠시 머물다 떠난 곳인 밤부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어디서 귀여운 판다라도 굴러들어올 듯한 재미난 이름이다.
밤부에서 한시간 정도를 더 걸어 촘롱에 도착한다.
촘롱은 아랫마을 윗마을이 있는데 거리는 대략 한 시간 정도 떨어져있다.
이 곳에 도착하자 그리운 단어가 보이기 시작한다.
INTERNET.
사실 ABC트래킹을 할 때는 웹(Web)에 접속할 수 없다.
네팔의 심카드를 사면 어느 정도 해발고도까진 모바일로 웹에 접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해발고도가 조금만 높아지거나, 골짜기로 들어가면 전화도 터지지 않는 곳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을리 없다.
우리도 첫째날 부터 장장 나흘간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했는데, 저 표지판을 보자 조금 구미가 동했다.
"우리 저기 한번 들어가 볼래? 인터넷 쓸 수 있대"
"그럴까요?"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갔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우스운 건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난 인터넷으로 할 것도 없었어, 내일이면 쓸 수 있는데 뭐"
"사실 저도 그래요 형 ㅋㅋ"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인터넷을 사용해야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건 얘기가 조금 달랐다.
라면.. 김치.. 백숙....
조금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진짜 맛있겠다. 그런데 비싸겠지?'
가난한 여행자인 우리들은 눈물을 흘리며 오로지 하산에 에너지를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내일이면 포카라에 갈 것이고, 그 곳엔 한국 음식점이 있으니 말이다.
14시 49분, 촘롱 출발
가는 길 어마어마한 산사태도 목격한다.
우어어.
대략 100m 정도 반경에 민가가 어마어마하게 모여있었는데, 다행히 저 곳은 큰 피해가 없어보였다.
거대한 만큼이나 산사태도 그 규모가 컸다.
쏟아져 내린 바위덩어리가 집보다 몇 배는 크다.
16시 11분 지누단다 도착.
이 곳엔 Hot Spring(온천) 간판이 있었는데, 사실 그다지 가고싶진 않았다.
당장에라도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오늘 하산을 끝낼까, 조금만 더 갈까 고민하던 찰나 그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땀을 흘리면 맥주가 더 맛있겠지?'
그래서 50여 분을 걸어 뉴 브리지 도착
17시 20분이었다.
둘째날과 마찬가지로 또 10시간을 걸었다.
강연이는 마을에서 만난 꼬마와 놀아주기 시작했고, 우린 근처에 숙소를 잡고 얘기했다.
"피자랑 볶음면 주세요~ 저희 씻고 올게요"
이 곳에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이게 얼마만의 Hot Shower인지.. 지금 내 머리카락과 얼굴을 지나 떨어지는게 물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씻고 나오니 진수성찬이 딱.
촘롱의 한국 음식점 부럽지 않았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맥주.
트래킹 내내 고산병 때문에 마시지 못했던 알코올이다.
우린 낮은 고도로 내려왔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여전히 산에 둘러싸인 마을에서 저녁식사와 함께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가이드북을 펼쳐보니 2일 일정으로 내려오는 구간을 우리는 하루만에 내려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지 빨리 내려왔구만'
하지만 그런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 멋진 동생녀석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떠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이 멋진 트래킹도 끝이겠구나.
제대로 만난지 5일 밖에 되지 않은 사람과 벌써 4일째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갑자기 시작한 트래킹이 이렇게 즐겁게 진행되고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간만에 마시는 알코올은 점점 내 피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트래킹 나흘 째 밤이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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