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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20120302)쥐

by 빛의 예술가 2013. 4. 16.

출근을 했다.

어제는 3시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에 몸이 나른했다.

요즘 마시기 시작한 술은 이치코.

유성옹이 꽤나 좋아할 법한 술이었다.



맥북 특유의 부팅 소리와 함께 업무가 시작된다.

내가 쓰는 맥북은 그레이스 켈리와도 같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든다.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아이폰을 거치대에 놓고, 맥북에 윈도우를 가동하는 파렴치한 짓을 하며

다음주에 아이패드가 나오면 홍콩에 가서 하나 집어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꺼내는 찰나

쥐를 만났다.


내 의자 옆에 대 자로 뻗어있는 쥐가 보였다.

이건 무슨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대도 아니고 사무실에 쥐가 있다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내 기척을 느끼고도 도망가지 않는 녀석의 작태였다.



소리가 나게 발을 굴렀다.

직원들이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싱긋 웃어주니 여직원들의 얼굴이 금시에 붉어졌다.

물론 지금 그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쥐는 미동 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만물의 영장이신 이 몸이 발을 굴렀음에도 꿈쩍하지 않다니

인류가 만들어낸 프레임 안에서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그런 비논리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생각이란걸 시작했다.

만물의 영장은 도구를 사용한다.

용기를 내어 딱딱한 종이를 반으로 접기 시작했다.

김기덕 감독이 만든 나쁜 남자는 코팅되어있는 종이를 세모꼴로 접어 사람을 죽이는데 썼었다.

피투성이가 된 조재현의 얼굴이 떠올라 조금 끔찍한 기분에 빠졌다.

물론 난 녀석을 찌를 생각이 없다.

종이를 이용해 축 늘어져있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봤다.

녀석은 미동도 없었다.

진일보하여 녀석의 폐부를 살랑살랑 건드려봤다.

꿈틀

했다.


씨발 조금 두려워졌다.

내가 기억하기로 쥐란 설치류는 이동속도가 빨랐다.

적당한 높이의 벽까지 기어오를 수 있는 발을 가졌다.

게다가 지저분하여 공기 중으로 각종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악독한 녀석이다.

이따이이따이 병이었나? 여하튼 그딴 이상한 병까지 옮기는 악종이라 배워왔다.

만약 녀석이 깨어나 내 책상 밑을 휘젓는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청소 아주머니를 불러야하는데, 난 쥐가 중국어로 뭔지 몰랐다.

짜증이 났다.

고개를 돌려서 녀석을 본 순간,

분명 대 자로 뻗어있던 녀석이 옆으로 5cm정도 이동해있었다.

젠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쓰레받이를 이용하여 녀석을 치우고 싶었지만 난 이미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잊었다.

짜증이 났다.


"XX씨 제 자리 밑에 쥐가 기절해있는데요, 이거 치워야되는데 뭐라고 말해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되요. '아줌마 불러서 쥐를 버리라고 해라' 라는 뜻이예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메신저를 주고받고 있던 찰나

녀석이 슬쩍 움직였다.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지구가 2012년에 멸망한다더니, 쥐 한마리가 내 인생을 멸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혼란스러웠지만 난 직원들 앞에서 근엄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있었다.

병신같았다.

힘이 빠진 쥐새끼 한마리 처리하지 못하고,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꼴이라니.

입에서는 방금 전까지 마시던 이치코의 향이 묻어났으며, 몸은 나른했다.


녀석은 한번 더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눈까지 뜬 상태였다.

나는 조용히 다리를 의자에 올려 양반다리를 했다.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이었다.

난 지금 성경의 요한묵시록을 지나고 있다.


그때 거짓말처럼 구원자가 등장했다.

구원자는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당당하게 등장해 시큰둥하게 녀석을 쓸어담았다.

터프했으며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김연아의 트리플 악셀을 보는 것처럼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내 인생을 위협하던 쥐 한마리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녀석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조금은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녀석은 왜 아침부터 내 자리 옆에서 쓰러져있었을까?




사실 이 곳에 녀석이 출입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따위 법이 있다 한들 만물의 영장이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자조석인 규약일 뿐이다.

우스워졌다.

인간들은 대체 무슨 권리로 땅을 잘라 내 것 네 것으로 구분하고, 타종의 생명체를 막아서는걸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쥐새끼가 지저분하고 더럽기 때문에 전염병을 옮긴다는 과학은 인간에 국한된 과학일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생명을 위협하던 녀석을 제거하자, 안도와 한숨이 밀려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난 이미 인간이 만들어 둔 프레임에 빠져 꼼짝할 수 없게 된 쥐새끼 한마리였다.

어쩌면 녀석은 내가 아니었을까?

그 곳까지 사고가 확장되자 슬퍼졌다.

우린 별반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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