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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여행기/아시아(Asia)

(여행기/인도) 무계획과 무목적에서 발견한 자유, 두 번째 인도 입국기

by 빛의 예술가 2017. 6. 4.

무계획(無計劃)이나 무목적(無目的) 속에서 자유(自由)가 나온다는 발상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中



[계획 計劃]


준수한 용모와 더불어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던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계획하는 일을 했었다.

일을 관두고 난 후 내게 있어 '계획'이란 단어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고민해봤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었다.

일종의 화두인 셈이다.



불교 용어 화두를 쉽게 풀어쓰자면 참선하는 이가 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문답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유명한 화두로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와 같은 것들이다.

내가 이 화두를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떤 사람에겐 답(答) 조차 할 수 없는 문(問)일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에겐 어떠한 답이 나오기도 하며, 또 다른 사람에겐 전혀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 '화두'다.

질문은 하나이지만, 대답은 하나가 아니란 얘기다.



내가 세워둔 계획이 계획대로 흘러갔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리 크지도 (하지만 작지도) 않은 규모의 회사였지만, 항상 어디선가 어떤식으로든 내 계획을 방해하는 요소가 생겨났다.

그럼 난 전력을 다 해 그 방해요인을 제거하는데 시간을 보냈으며, 뒤틀린 계획을 다시 세우고, 또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나의 계획이 끝나, 리뷰를 할 때 즈음이면 처음 만들어둔 계획은 폐지(廢紙)만도 못한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가지고 나를 혼내거나 꾸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역시 '계획'의 속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계획대로 될 수 없다는 역설적 속성을 가진 것이 바로 계획이다.




인도 소나울리에 도착해, 기차역이 있는 도시로 이동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나라는 일부 고산지대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곳이 기차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환전소로 추정되는 곳으로 찾아 들어갔다.

어느 나라든 환전소에서는 가벼운 영어가 통하고, 여행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주인은 친절하게도 지도 한장에 위치를 표시해 가며 넌 지금 여기에 있고,

이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있는 도시는 고락푸르(Gorakhpur)라고 말해줬다.

어림짐작 해보니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 떨어져있는 도시였다.


'문제 없이 일찍 도착할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어디서 버스를 탈 수 있는지 확인한 후 여행사를 빠져나온다.




오랫만에 탑승하는 인도의 버스.

다행히 사람들이 버스에 많이 타지 않아, 내 두개의 배낭은 옆자리 좌석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시계를 봤다.

4시 32분.


분명 여기서 고락푸르까지 손톱만큼 떨어져있었으니, 여유있게 도착해서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선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일기도 쓰고, 사람들을 만나면 잡담도 해야지, 다짐했다.

오산이었다.



분명 지도에는 새끼 손가락의 손톱만큼 떨어져있었지만 약 110Km정도의 거리를 달려가야한다.

두 도시 간의 거리만 가늠했던 까닭에 지도의 축적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최소한 포카라의 위치만 확인했어도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처음 가보는 길이기 때문에 도로 컨디션은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인도에서 110Km를 로컬버스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3시간, 길면 4,5시간은 족히 걸릴거라 생각했다.


네팔, 포카라를 떠나며 세워뒀던, 혹은 수정하던 계획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 상세한 계획도 아니었는데, 모든게 뒤틀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화가 난다거나, 짜증스럽진 않았다.


계획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차분히 의자에 앉아 다시 조우한 인도의 거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목적(目的)]


버스 안에는 대략 20명의 인도인들이 의자에 앉아있었으며,

나를 제외한 여행자는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꼬마들은 신기한 눈으로, 큰 배낭을 옆에 끼고 앉아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며

나는 그들에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몇몇 사람들은 내게 어디로 가는지 질문을 던졌는데, 

난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나는 지금 왜 고락푸르로 가는걸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목적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분명 기차역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왜 기차역이 있는 곳으로 가야하는거지?

조금 더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움직이면 장점은?

체력을 비축하고,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한 부수적인 이유를 차지하고 근본적인 목적은?


거기서부터 난 길을 잃어버렸다.

분명 버스는 고락푸르를 향해 흙먼지를 내뿜으며 달리고 있었지만, 난 미아가 된 것처럼.

외딴 인도의 도시에 도착한다.



고락푸르 기차역을 찾아가니 이미 오후 8시가 되어있었다.


난 외딴 곳에 떨어졌으며,

이미 해는 찾아볼 수 없는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새벽부터의 강행군에 피곤했으며,

배가 고팠다.

사람들은 큰 배낭을 메고 다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으며,

네팔에서 느낀 것과 차원이 다른 무더위가 온 몸을 휘감았다.

땀이 났다.

갈증도 났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도 잃어버렸고,

그에 상응하여 목적도 망각했다.


그렇게 난,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으로 들어갔으며, 열차 시간표를 주욱 훑어봤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탑승할 수 있는 기차는 몇 있었다.


순간 익숙한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바라나시'

그래, 인도에 가면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도시다.

출발은 지금부터 한 시간 뒤.

표를 끊는다.



어떻게 이 티켓을 받아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인도에는 열차 등급이 있는데, 역무원은 묻지도 난 답하지도 않았었다.

75루피?

7시간은 타고 가야하는 거리인데, 너무 싸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적혀있는 것처럼 '바라나시'로 갈 수 있겠지.



기차에 올라타자 내가 산 티켓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Chair Class 그 중에서도 에어컨이 없고, 선풍기가 달려있는 가장 저렴한 등급의 티켓이었다.

2S 혹은 General Class라고 부른다.

지정 좌석이 없고, 나란히 3명정도가 앉을 수 있겠다 싶은 공간이었지만 여긴 인도다.

당연히 4명이 기본적으로 앉았고, 어린아이가 있는 경우 그 숫자는 5까지 늘어난다.



오늘 새벽 5시에 네팔, 포카라에서 출발했으니 대략 16시간 정도를 달려온 셈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대략 8시간 정도를 더 가면 바라나시에 도착한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 꽉 끼여 딱딱한 의자에 앉아 8시간을 버텼다.

아마 버텼다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땀이 흘렀으며 무릎에 올려둔 보조배낭은 천근같이 무거웠다.

목이 말랐지만 물은 다 마셔버리고 없었으며, 물을 구하러 밖으러 나갈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일어서는 순간 자리를 빼앗기는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도 쿨쿨 자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도 몇 차례 선잠에 빠져들었다.



새벽 5시

난 만신창이가 된 채 바라나시에 도착한다.

출발 후 정확하게 24시간이 경과해 도착한 곳이었다.





[자기 변명, 혹은 자유]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둑어둑한 모습이었지만, 

릭샤꾼들과 호객꾼들은 멀리서도 여행자의 도착을 알아보고 내 주위로 달려든다.


'난 정확히 이 곳에 뭐가 있는 줄도 몰랐고, 어느 곳으로 가야 숙박시설이 있는 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릭샤꾼 대여섯명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생소한 목적지를 말하며 돈을 크게 외쳐댔다.

나는 씨익 웃으며 담배 하나를 꺼내물었다.

그네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천천히 담배를 피운다.

그 와중에도 릭샤꾼들은 내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계획도 없고, 목적도 상실한 채, 체력조차 방전된 상황.

분명 나른했지만 행복감이 밀려왔다.

난 지금부터 도착한 외딴 이 곳에서 뭐든지 할 수 있을거란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난 릭샤를 타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그네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도착했어. 그런데 이제부터 뭘 할까?"



피로가 누적되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로, 목적도 계획도 잃어버린 채 도착한 생소한 도시에서,

우스꽝스럽게도 난 자유를 느꼈다.


양귀자의 소설 속 그 문장이 생각났다.

그래, 난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고 지금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열정이고 비전이고 잡지랄이고,

적어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자유가 가짜가 아닐진대.



두 번째 인도 입국기

무계획과 무목적에서 발견한 자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