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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20130424)내 이야기

by 빛의 예술가 2013. 4. 24.

스펙을 높이려 안간힘을 쓰는 자들을 비웃었다.


'spec? 사람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한 사람을 스펙 따위로 판가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사색하고 행위하며 타인을 설득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블로그에는 온갖 수상 경력과 사회 생활 이력, 자격증 리스트 따위가 자랑처럼 나열된 내 소개 글이 갱신되고 있었다.


오래 된 일이 아니다.


몇 해 전 내 이야기다.


지금은 닫아버려 남들은 볼 수 없는 치졸한 과거이지만, 나는 언제나 그 글을 볼 수 있다.


지우지 않은 이유는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이유는 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 만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대학생들과 달리 빚에 시달리지도 않았으며,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학교 생활을 다녀야 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으니까.


남들과 달리,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는 월급도 오로지 내 사진 장비의 구색을 늘리기 위해 존재했다.


술을 먹고 싶을 때는 아무나 불러 술을 사줄 정도로 두둑한 지갑이 있었고, 그에 파생하여 '그다지 두렵지 않은 세상'이 궁금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볼 '여유'까지 가질 수 있었다.


현명한 부모님께서는 항상 올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였고 그렇게 나는 평범해졌다.


그리고 난 행복하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좋은 회사에 취직을 했었다.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청년 실업 문제와는 조금 달리, 몇몇 대기업에도 합격을 하고 그 회사에도 합격을 했었기 때문에 난 회사를 '골라서'갔다.


연봉도 무지막지하게 줬다.


해외 주재원 경력까지 쌓을 수 있었고, 중국어로 능숙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직장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친절했고, 매일 바쁜 일상이긴 했지만 바랬던 바였다.


회사는 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내주었고, 그 집을 청소해주는 가정부가 있었고, 기사까지 있었다.


옷이나 전자제품따위를 사야할 때면 기사에게 부탁해 홍콩에 쉽게 갈 수 있었으며, 가끔은 쾌속선을 타고 마카오로 갬블링을 하러 다녔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사치스런 삶이었다.


하지만 난 행복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기숙사에서 생활했었다.


집과 학교가 가까웠지만 학업에 열중하기 위해 기숙사에 들어갔던 것이다.


공부를 조금은 멀리하고 기타를 잡고 이곳 저곳 뛰어다니며 공연을 했었다.


그리고 가출(이지만 부모님은 모르는)을 밥먹듯 했다.


항상 가출을 하게 되면 여행을 갔었다.


주머니에 이만원을 넣고 아무 열차나 무임승차한 후 강원도로 훌쩍 떠나기도 하고,


표를 점검하러 다니는 승무원이 무서워 맥주를 한 캔 사놓고 홀짝이며, 그들이 다가오면 맥주를 엎지르고 화장실로 유유히 도피하곤 했다.


히치하이킹을 하러 길 위에서 몇 시간 동안 손을 흔들어대기도 했으며,


길에서 만난 술취한 아저씨의 모텔에 따라가 침대를 차지하고 잠을 청해보기도 했다.


찜질방에 들어갈 돈 조차 없어 시골 파출소에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라면을 끓여먹고 잠을 자기도 하고,


가방 속 수학의 정석, 개념원리 수학 따위의 책을 잔뜩 짊어지고 강원도 정선 이곳 저곳을 배회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영월에 도착했다.


한 커플을 만났었다.


고등학생인 나와는 달리 대학생들이었는데,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많지 않다.


하지만 실체가 있다.


그들을 만나고 며칠 후 집으로 편지가 날아왔는데 길에서 나를 찍어준 사진 몇 장이 동봉되어있었다.


그리고 짧지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메시지가 있었다.


포스트 잇에 대충 휘갈긴 한 문장.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많은 곳을 다녀보길 바래."





아마 그 때 난 행복했을 게다.


그리고 


앞으로도 난 행복할 게다.


행복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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