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어린 거지들이 많지 않다.
어떤 선진국처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하루 종일 서울 거리를 쏘다녀도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정도는 되었다.
그에 반해 성인이나 노인이 된 거지들은 상대적으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데,
어느 전철역을 가든, 어느 지하도를 가든 우리는 거지들을 만날 수 있고, 1인 1구걸통 체제를 유지하는 그네들의 생명줄은 텅텅 비어있기 일쑤였다.
요즘도 우리나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많지 않은 거지들을 가끔씩 객차안에서 만날 수 있지만, 승객 60명이 넘게 타고 있는 객차에서 거지들에게 적선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기술의 진보(혹은 인류의 퇴보)로 인해 사람들은 냄새나는 거지나 앵벌이를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고, 조그만 문고본이나 주간지 따위에 눈길을 고정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의 거지나 앵벌이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기에 이른다.
자기들의 처량한 사정을 적어(혹은 지어내) 승객들의 무릎에 그 사연이 적힌 종이을 던져놓는가 하면, 시끄러운 소리를 지르는 소형 앰프를 허리춤에 차고 사람들의 주목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거지나 앵벌이의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진보된 기술을 바탕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손에는 스마트폰이란 이름을 가진, 인류 역사상 "만물의 영장"이란 네이밍(naming) 이래 가장 멍청한 이름을 얻게 된 기계를 꼭 쥔채로.
요즘 한국의 거지와 앵벌이는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
다시 과거로 회귀하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사람들의 동전을 기다릴 뿐이다.
상상력의 부재다.
차가운 사회에 그네들의 정신과 마음이 얼어붙은 것이다.
그리고 난 조지아(Georgia)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에서 우리와는 다른 그네들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녀석들은 객차에 올라탄 채 귀찮은 듯이 구걸통을 땅바닥에 던지곤 이내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신나게 북과 아코디언을 이용해 즉석 공연을 하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보며 사람들에게는 눈길 한 번 건네지 않는다.
그렇게 역 하나를 이동할 정도의 짧은 순간에 공연은 끝난다.
난 그날, 수없이 봐왔던 역대 지하철 앵벌이 가운데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광경을 목도한다.
녀석들은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귀찮다는 표정으로 구걸통을 들고 유유히 객차를 빠져나간다.
사실 내가 그들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앵벌이의 기술 진보가 아니다.
음악에 대한 진정성이었다.
어린 친구들을 지하철까지 내몰 수 밖에 없는 이 나라의 빈약한 복지 환경도 이해가 되었지만, 그 환경을 타개하기 위한 어린 친구들의 노력이 가상의 수준을 넘어 멋지게 보였다.
인류 역사상 각 분야 제 1의 뮤지션들은 멍청한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밑바닥에서 부터 뒹굴며 악기를 연주했고, 오만군상 앞에서 즉석 공연을 하며 관중들의 세심한 기분 하나까지도 알아챌 수 있는 감각을 길러왔던 것이다.
작은 사진기를 디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녀석들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가 지하철 앵벌이나 하고 있지만, 10년 후에는 매스미디어에서나 나를 만날 수 있을걸?'
실제로 그리 되었으면 한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10년쯤 후에 내가 어디선가 녀석들의 기사를 읽게 된다면 그런 제목이었으면 한다.
"지하철 앵벌이에서 카네기 홀에 오르기 까지"
지하철 앵벌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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