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짜는 일을 했었다.
2년 정도 그 일을 반복하고 있자니 계획에 관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세상에 계획대로 굴러가는 일은 전무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일을 완수하기 위해선 계획이란게 꼭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역설이었다.
그리고 난 그 거대한 역설에 사로잡혀 사고능력을 박탈당한 로봇처럼 계획을 수립하고 또 변경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난 이번 세계일주를 위해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남들은 35박 36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나도 "여행 계획서"따위의 거창한 제목의 문서를 인쇄해서 들고 다니던데, 난 그런 것도 없다.
계획이란게 있다면 이게 전부였다.
"일단 방콕 공항에 떨어지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반 시계 방향으로 돌고 서쪽으로 가되, 되도록 육로로, 아프리카는 북에서 남으로, 남미도 반 시계 방향으로. 쿠바는 꼭 가기~"
그리고 난 한 줄짜리 계획으로 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쪽으로 신나게 행진 중이다.
그렇게 유럽의 발칸에 도착했다.
물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께서 말하신 지즉위진간(知則僞眞看)의 가르침을 훼손하려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 분의 뜻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것'을 어느정도 '수준'으로 미리 알아 가야하느냐는 물음에는 개개인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외려 얕은 지식을 쌓아 '그 것'들과 조우하는 것 보다는 백지장같은 배경 지식으로 '그 것'들과 조우할 때 더욱 크고,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난 당돌하게 거의 대부분의 것을 계획하지 않고 떠났으나, 지즉위진간(知則僞眞看)의 실천을 위해 한 가지 계획한 것이 있었다.
'여행의 일상화에 대한 경계'가 그 것이다.
처음부터 내 목표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해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을 위해 선택한 세계일주가 일상처럼 변해버린다면 나는 중심조차 잡지 못하고 휘청거릴게 분명했다.
그래서 거시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어떤 것을 봐도 감흥이 없고, 무엇을 먹어도 별반 다를게 없고, 누구를 만나도 단속적인 여행 얘기만 떠들어대며 실증을 내는 내가 보였다.
그 시점이 중요했다.
내가 어느 시점에서 여행의 일상화를 경험할지가 이 계획의 전부였다.
이미 중학교 시절 IQ 154를 돌파한 내 천부적인 두뇌를 광속으로 회전시켜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그렇게 난 여행의 어느 시점부터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모호해질지 판단하기 시작했다.
결과가 도출됐다.
"젠장 모르겠다."
IQ가 160만 되어도 '네 놈은 여행을 시작한지 어느 시점 후부터 어떻고 어떠한 일들을 겪게될 테고, 그 일이 진부해지고, 또 다른 대상과 조우해 상황의 타개를 모색하지만 또 다시 반복되는 어떻고 어떤 일들에 지쳐 정확히 어느 시점에 여행의 일상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었다.
하지만 160이 되지 않는 내 지능지수로 정확한 시점을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해결 방안을 선 강구하기로 했다.
당시 내 주위에는 년 단위로 여행을 하는 장기 여행자가 없었기 때문에 철저히 문헌 조사에 집중했었다.
그렇게 간만에 도서관에서 책을 뒤져보고, 웹에서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며 여행이 일상처럼 변해버릴 때 어떻게 대처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중 떠올렸다.
여행의 일상화가 시작되어 모든 것이 시시껄렁하게 변해버릴 그 때.
일상 속에서 강구했던 해결책을 통해 그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면 이는 여행의 일상화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일상화를 가속시키는 행위는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해결 방안이 도출된다.
'그건 뭐.. 그때 가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맥주나 마시자.'
이건 절대로 귀찮아서 도출해낸 결론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 여행의 일상화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지금, 맥주나 마시자는 그 결론은 피에르 부르디외도 놀라 자빠질 만큼 위대한 '구조와 기능'에 대한 통찰력의 소산임에 분명했음을 감탄하는 중이다.
여행을 시작한지 180일이 조금 지난 현재
난 여행의 일상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좀처럼 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일주일 간 아무것도 아니하고 먹고 마시고 자기'솔루션을 활용하는 중이다.
오늘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미친 듯 밖으로 나가고 싶어 비를 맞으며 걸었다.
아무래도 내 몸은 다시 길을 걷고 싶어진 모양이다.
또 언젠가 이 여행이 일상처럼 변하게 되는 때가 올까?
하긴, 이제 걱정 하지 않는다.
난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뭐 그때 가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맥주나 마시자'
비내리는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에서
(일 주일 째 놀고 먹고 마시고 잠자기를 반복하고 있는) 권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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