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상(斷想)

(20060817)夏日斷想

by 빛의 예술가 2013. 4. 16.

2006년 8월 15일.

 

내 인생을 송두리째 콱 비틀어버리는데 일조했던 다섯 명의 노인네들을 만나러 갔다.

 

그 곳엔 나 처럼 사춘기를 도둑맞아버린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하늘에서는 이따금씩 비가 쏟아진다. 맑은 비. 맞아도 기분 좋은 그런 비.

 

배가 무지무지 고파서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와 맥주를 샀다. 그렇게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며 맥주를 마시고 있을 무렵, 아직 반도 마시지 못한 캔 맥주를 떨어뜨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3,000원 짜리 캔 맥주를 아쉽게 날려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를 표했을 테지만 이번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마 할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니다. 분명 그 순간 나는 캔 맥주를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분명했다.

 

그렇게 반쯤 얼어 넋이 나간 채로 멀어져가는 그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어붙어있던 간뇌가 이제서야 활동을 하고, 뒤이어 시상하부에서 내 몸의 체온을 정상수치까지 올린다.

 

'난 대체 무엇을 본 것인가?'

 

여전히 배가 고파  다시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샀다.

 

이번에는 벌컥벌컥 기분좋게 들이마신다. 식도를 넘어 위를 지나 십이지장을 지나, 여튼 무서운 속도로 알콜이 내 몸 속을 헤집고 다닌다.

 

이제 배가 고프지 않다.

 

역시 내 몸은 멋지다고 생각하며 담배를 입에 문다.

 

그런 식으로 생존의 욕구가 충족되자 다시 아까 봤던 그 상황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노인네들을 만나러 온 약 3만명의 사람들과 야구를 보러 온 약 8,000명의 사람들에서 농구를 보다 일탈하는 사람 100명을 합해 3만 8천 1백명의 사람들 중. 그 여자를 발견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자와 함께 있는 그 여자.

 

세부적으로 묘사하자면 METALLICA란 영문자가 프린팅 된 티셔츠를 커플룩으로 맞춰 입고,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웃으며 내가 아닌 남편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 여자를 본 것이다.

 

아마 저 따위로 생겨먹은 남자가 METALLICA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반추하며 옛 생각을 한다.

 

그녀의 친구가 내게 말했었다.

 

'그 조용하던 애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 핌프락이라고 하더라? 너 도대체 어떻게 된거 아니야? 어떻게 사람을 그런 식으로 바꿔버릴 수가 있는거지?'

 

나도 모른다. 난 아무 짓도 안했다. 정말이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좋아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 밖엔 없다.

 

그런 식으로, 난 평범하게 잘 살아야할 사람을 옆으로 밀쳐버린 것이다.  진창에 빠뜨려버렸다.

 

그리고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

 

'그게 만약, 내가 예전에 선물로 줬던 반지라면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 그 웃기다 못해 역겹게 생긴 남자를 때려 눕혀버리고,그녀와 키스를 하고, 손을 잡고 달아나버려야겠다.' 라는 확률 낮은 기이한 상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내가 줬던 싸구려 반지와는 굵기부터 게임도 되지 않는, 번쩍거리는 반지. 아마 순금이리라.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아주 약간 비참한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줬던 그 반지를 끼고 왔다면 그건 일류 소설의 시나리오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그 무엇도 잊지 못하고, 잊을 수 없고, 잊고 싶지 않은 그녀는 그 남자를 찾으러 반지 하나를 달랑 낀 채, 아마 그 남자가 이 공연을 보러 올 거라는 희박한 확률에 몸을 맡긴 채. 다시금 그와 함께 생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행복한 기분에 빠져, 인파가 많은 곳을 헤집고 들어가 옛 추억을 곱씹을 것이다.

 

 

 

귓청을 찢어버리는 듯한 소리가 상하좌우에서 울려퍼진다. 무대위의 저 인간이 드럼페달을 밟을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의 고문이다.

옆의 인간이 질러대는 소리는 공해다.

 

정상인의 시각에서 볼 때, 이건 정말 소음의 합창인 것이다.

하지만 제 정신이 아니었던 예비 고등학생과 그의 여자친구는 마냥 좋아서, 첫 눈오는 날의 개 처럼 날뛰는 중이다.

 

그러던 와중 여자친구가 어디론가 휩쓸려 간다. 공연장에서 휩쓸리는 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휩쓸려 버리면 죽는 경우도 있다. 음의 파동에 미친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이곳 저곳 약한 피부가 찢겨져 나가며, 심장을 밟히고, 식도를 밟히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되고, 결국엔 압사하는 것이다.

 

 

소용돌이의 근원지는 위대한 U.S.Army

근육질의 흑인과, 눈의 초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백인이 주위를 압도하며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때 달려갔었다. 거의 기적과도 같이 근육질의 흑인을 밀쳐버리고 주위 사람들을 사방으로 쓰러뜨린 후, Fucker란 단어를 뒤로 하고 그녀를 부둥켜 안고 스테이지쪽으로 달아났었다.

 

뒤 쪽에서는 하이-파이 메시지가 미친듯 울려퍼지고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그녀를 끌어 안고, 코를 그녀의 머리에 파 묻은채,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들었었다.

 

 

10분을 그렇게 서 있었을까. 그녀가 말한다.

 

"그거 알아?"

 

"..."

 

"나 지금 너한테 반했다는거."

 

 

 

 

시간이 흐르고 지나 그 본질마저 변색시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5년의 세월.

 

지금의 그녀 옆에 있는 남자는, 사람이 두 발로 공연을 보러 들어가, 대자로 뻗어 들것에 실려나오는 사실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인간이다. 그런 인간을 믿고, 5년 전 보다 더 과격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찾아온 그녀.

 

아주 잠깐이지만 희미한 웃음과 함께 그녀를 다시 한번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단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별한 후에야 사랑을 알 수 있다는 노래 가사가 떠오르고, 눈이 찔끔찔끔 아파왔다.

 

친구를 만나 공연장에 들어가는 순간 생각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넘어지는 순간, 밟아 죽여버리겠다고.

 

그런 식으로 독기를 품고, 그런 기세로 점프를 하고 그런 류의 소리를 지르고, 그런 신념으로 슬램을 하고, 그 신념을 행동으로 표출해 옆에 들러붙는 인간들을 가격하며, 전투를 마쳤다.

 

멀리서 앰뷸런스의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난 씨익 웃으며 노인네들을 향해 공손히 퍽 유를 날리며 돌아선다.

 

 

 

일류소설의 시나리오감.

 

다이내믹한 줄거리는 필요 없다. 단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색출해야하는 것이다.

 

저 작가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이런 3류 연애담을 쓰고 있는 권 문경이란 인간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걸까?

 

그게 단 한명이 되었든..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랫만에 내가 살아 숨쉬는 소리를 듣게 해준 5인의 노친네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여름날의 단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