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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120919) 사직서와 라이트 블루

by 빛의 예술가 2012. 9. 26.

사직서를 썼다.

제출하진 않았다.

멀지 않은 미래, 난 이 종이를 제출할 예정이며

그보다 멀지 않은 미래, 이 회사는 나를 놓아줄 것이다.

빠르면 올 겨울

난 백수가 된다.



이유를 쓰라고 한다면 세계일주다.

반드시 세계일주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난 이유를 그 것으로 꼽는다.

이종의 메타포인 셈이다.


내가 세계일주를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유는 세계일주여야 한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운전 기사가 있고, 강이 보이는 12층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나를 과장이라고 부르며 지시를 기다리는 직원도 있다.

세후 연봉이 5천 만원에 육박하고 있으며 숙식에 교통, 통신비가 지원되어 돈이 나갈 일도 별로 없다.

주재원들은 모두 내게 친절하며, 현지인들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

아버지 뻘의 임원들과도 자주 연락을 하고, 특출나진 않지만 그들에게서 인정받고 있다.

돈을 내지 않고 중국어를 배울 수 있으며, 일본, 미국의 고객과도 가끔 연락하며 4개 국어 구사 능력을 녹슬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연봉 5천만원을 받으며 일했던 사람이, 5천원 짜리 백반 한 끼를 사먹으며 벌벌 떨어야하는 상황이 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마 여자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백만년 전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백수를 만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하철이나 공공 버스란 것을 타야할 지도 모른다.

더 이상 개인 기사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홍콩에 가기 위해 전화 한 통화면 되지만, 이제는 쉽사리 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쪽방이나 판잣집을 구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래, 

이제 그 공간에서 스스로 빨래를 하고, 건조시키고, 수납장에 넣는 짓을 해야한다.

가정부도 없기 때문이다.

그 밖에 미래에 닥쳐올 위험에 대비할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재형 저축을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을 했다.


10분 정도 고민이란 걸 했을까? 

답이 도출되었다.




사직서를 쓰자.

당분간 라인을 이탈하자.

모두가 미친듯이 한 곳을 향해 뛰고 있는 이 라인을 잠시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 잡히면 밟히고, 따라 잡으며 짓밟는, 큰 의미 조차 부여할 수 없는 이 생활을 청산하자.



아마 나는 앞서가는 몇 놈을 따라 잡았을 테고, 몇 놈은 내게 밟혀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놈들 중 몇 놈은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몇 놈들이 나를 따라 잡았으며, 몇 놈은 나를 즈려밟고 질주하고 있었다.

어쩌면 난 놈들에게 죽을 지도 모른다.


우스웠다.




행복하지 않았다.

나이를 스물 여섯이나 쳐먹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신이 섰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아니었다.

2년을 일해보면 그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난 추락할 것이다.

끝도 보이지 않을 팔열 지옥 아래로 폐곡선을 그리며 추락할테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날기 위해선 움직여야 한다.

이대로 사뿐 사뿐 걷는다면 추락하지 않겠지만, 날 수도 없다.



사직서를 썼다.

몇 번이고 콧잔등을 문질렀다.

손목에선 라이트 블루 향기가 진동했다.


라이트 블루와는 다르게,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하지만 조금 대견스럽기도 했다.

나이를 스물 여섯이나 쳐먹고, 아직 꿈도 미래도 없지만,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젠장, 

미사여구고 지랄이고

어쨌든 백수는 백수다.




즐거운 백수 생활을 천천히 준비하기로 한다.

오랫만에 가슴이 뛴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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