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철창 안이다.
투영되는 푸르름은 5월의 녹음과는 달리 그 밀도를 견고히 하였다.
어쩌면 녹이 슬었을 지도 모른다.
어두운 이 장소에서 철창의 녹을 생각했던 이유는 강철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네 발자국 정도 걸어야 닿을 수 있을 거리에 펼쳐진 철장이다.
거리가 멀다.
이렇게 심한 냄새가 날 리 없었다.
분명 녹이 슬었으리라 확신했다.
난 어딘가에 묶여있었는데, 철장을 인식했던 내 안구조차 무엇이 나를 옭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팔이 허공을 향해 있었으며, 두 다리는 비정상적으로 벌어져 있었다.
묶여있다.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실 뿐이었다.
불안해진 나는 목을 이리 저리 돌려보았는데, 목을 죄고있는 '어떠한 끈'이 귓볼을 간지렸다.
씨팔.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대체 어떤 것이 나를 이 모양으로 묶었는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호의는 없다.
양 팔과 다리도 부족해 목에도 무엇인가를 걸어놓을 정도의 것이라면, 내게 호의가 있을 리 없다.
무엇인가가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 순간 살려달라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반사되는 소리에서 이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좁았다.
나에게 살의가 있는 어떠한 것이 이 좁은 공간에 나를 감금했다.
그 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나는 살아야겠다.
삶에 대한 일념으로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때 찰캉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발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먼 거리에서 또각또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로 보폭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점점 다가온다.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다.
크고, 또렷했으며 다섯 번의 또각거림에 그 것은 이미 내 뒤까지 접근했다.
이게 목 덜미가 서늘하다는 감정일까?
사람의 안구가 뒤쪽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 마땅스러웠다.
숨 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긴장한 상태로 그 것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아무 말 조차 꺼낼 수 없었다.
오로지 그 것의 다음 행동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때 그 것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실인지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 시점부터 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1분 후
모든 힘이 빠졌다.
인간의 몸부림이 이다지도 약해빠진 것이란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불어 그 것이 내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죽지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 것이 내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비밀 한 가지를 말해라."
그 것의 말이 끝나자 어깨죽지가 찢어질 듯 아팠다.
피 냄새가 났다.
비밀을 말 하라니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밀 한 가지를 말해라."
인간이 아닌 그 것은 인간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 감흥을 느낄 새도 없이 이번엔 오른쪽 어깨죽지가 날아가는 듯한 고통이 왔다.
"비밀 한 가지를 말해라."
그 것은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더불어 비밀을 알고 싶어한다.
선택의 여지란 없다.
어차피 죽을 것은 자명했으니, 그 것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파악하기 위해선 말을 해야했다.
"사실 결혼을 한 뒤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제가 결혼했다는 걸 아는 사람도 한 명, 불륜을 저질렀다는 걸 아는 사람도 한 명입니다"
그 것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과연 그 것이 불륜이 무엇인지 알기는 할까?
피 비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내 것이다.
"네가 누군지 말해라"
그 것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며 학습효과의 영향 아래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 이름은 권문경이고..."
온갖 것을 지껄이며 나란 존재를 말했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자기 소개가 끝나자 마자 왼쪽 허벅지에 통증이 왔다.
움직일 수 없었다.
'독이 묻은 침'정도로 예상했다.
하지만 뚝뚝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로 피가 흘렀다.
'침'정도가 아니었다.
"여자 관계를 말해라"
이번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것은 대답을 하지 않거나, 생각을 하면 무엇인가를 내 몸에 쑤셔박는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질문이 떨어짐과 동시에 개처럼 대답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말을 지껄여대는지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정체모를 그 것은 적어도 내 몸에 정체모를 무엇인가를 쑤셔박진 않았다.
그렇게
몇 차례의 질문이 오갔다.
입에선 침이 흐르기 시작했으며, 그와 반대로 입 주위가 메말라 쓰리기 시작했다.
살아서 나갈 수 있을거란 확신이 들었다.
무엇이든 대답하면 된다.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 대답만 하면 된다.
살 수 있다.
이처럼 비릿한 생의 희망에 히죽였다.
이런 상황에 웃음 지을 수 있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때,
그 것이 마지막으로 질문을 했다.
"네 꿈을 말해라"
...
생각이란걸 했다.
아니,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꿈을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지껄여댈 순 없었다.
왼쪽 심장이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
느낌이 아니었다.
내 두 눈에 내 몸을 꿰뚫었을 정체모를 그 것이 희뿌옇게 투영되었다.
꿈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내 꿈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꿈을 말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해야했다.
생각을 하기 위해 피의 순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때 깨달았다.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두 눈을 치켜뜨는 것 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었다.
몸 전체가 늘어지고 있다.
그 조차도 왼쪽 팔과 다리에는 감각이 없었다.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렇게 내 존재가 늘어져가고 있을 때까지, 난 내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정체모를 그 것은 없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 꿈을 꾸는 피투성이의 내 모습만 존재할 뿐이었다.
-Fine.
'단상(斷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0919) 사직서와 라이트 블루 (0) | 2012.09.26 |
---|---|
(120627) 지속 가능한 노름질 (0) | 2012.09.26 |
(120517) 여름방학 (0) | 2012.09.26 |
(120429) 넌 아직 쥐가 아니네 (0) | 2012.09.26 |
(120411) Angry? Just vote. (0) | 2012.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