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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120429) 넌 아직 쥐가 아니네

by 빛의 예술가 2012. 9. 26.

오늘 지갑을 펼치자 1원짜리 지폐만 가득했다.

나는 월급을 달러로 받기 때문에 환전이란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거쳐야 이 곳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

물론 하루라도 음주를 빠트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행할 도리가 아니기에, 급히 환전을 부탁했다.



사무실에는 주재원의 월급을 담당하는 금융설계사 비슷한 직원이 하나 있다.

하지만, 재테크를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시키면 돈을 인출하는 것

그리고 환전하는 것.

조금 고차원적인 업무라면, 환전을 한 돈을 인출하는 것.

매우 고차원적인 업무라면, 주재원이 주말 식사를 하고 영수증을 주면 ERP에 등록하는 것이다.



1원 짜리 지폐밖에 꽂혀있지 않은 내 지갑에 미안해졌기 때문에 천 불을 환전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천 불이라면 하루 술 값밖에 되지 않겠지만, 이 곳에서는 석 달을 족히 버틸 수 있는 액수다.

똘망똘망한 그 직원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천불을 위안화로 환전한 뒤 영수증을 보여줬다.

통장을 따로 건네지 않았기 때문에 내 계좌에 어느 정도의 돈이 쌓여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뭐, 당장 목 말라 죽을 정도로 가난하진 않겠지.'

자위하며 가방 안에 영수증과 여권을 던져 넣었다.



그때였다.

완제품 창고를 관리하는 대리 반장이 나를 찾아왔다.

내 업무는 창고 관리와 관련이 없지만, 우습게도 완제품 창고만은 내 직속 파트로 지정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고 싶은 제품을 마음대로 꺼내 쓰는 즐거움이 있긴 하다.

...

어쨌든 

그 때, 대리 반장이 날 찾아왔었다.

난 녀석을 다음 달에 반장으로 진급시킬 심산이었기 때문에, 녀석이 이번 달에 진급을 시켜달라고.

그렇게 나를 조르려 온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녀석은 차분차분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난 내가 중국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반대로 알아들은 줄 알았다.

녀석은 반장으로 진급하고 싶지 않으며 오히려 아래로 내려가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되물었다.

"반장이 되면 돈을 더 받는다, 넌 돈을 더 받고 일하고 싶지 않니?"

그러자, 녀석은 월급 명세서를 들고 왔다.

1450원, 1500원, 1400원 이렇게 세 달치 월급이 적힌 종이였다.

평균을 내보았더니 약 1400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이 정도의 금액이라면, 이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 가운데서도 적은 편이다.

내가 월급 명세서를 다 보길 기다린 후 녀석은 차분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과장님, 한 달동안 매일 밥을 사먹으면 400원이 들어요."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녀석이 진급을 거부하고 외려 아래 직급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것도, 한 달에 밥을 사먹는데 어떻게 400원 밖에 들지 않는 건지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중국어를 잘못 알아듣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완성품 창고에 쌓인 박스 중 하나에는 1400그리고 400이 적혀있었다.

녀석은 아래 쪽에 300이란 숫자를 적으며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과장님 담배가 한 갑에 10원이예요. 한 달을 피면 300원이지요."

그제서야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과장님 아침을 먹게 되면 한 끼에 3원이 들어요. 한 달이면 90원이네요."

90이란 숫자를 적는다.


녀석은 창고 관리인 답지 않게 자기가 쓴 숫자도 계산을 빨리 하지 못했다.

얼굴을 쳐다봤다.

울고 있진 않았다.

"600원 정도가 남네요."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의 귀퉁이를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간다.

"이 남은 돈으로 옷도 사야되고요...헤헤 "

녀석은 웃고 있었다.

난 차라리 녀석이 내게 이런 말을 하며 화를 냈으면, 

내 멱살이라도 잡고 이게 무슨 지랄같은 인생이냐고 욕을 해주길 바랬다.

녀석은 자신의 한달 씀씀이에 관해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설명을 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슬펐던 것은 녀석의 차분함이었다.

1400이란 숫자를 쓰며 시작했던 설명은 600이란 숫자를 적으며 마칠 때 까지 차분한 논조였다.



무엇이 이 남자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이유는 신자유주의니, 부루주아니, 거대 담론을 이야기 하지 않고서라도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덫에 걸린 것이다.


덫에 걸린 쥐는 즉사하지 않는다.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물론 덫에 옥죄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덫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 치면 칠 수록, 덫은 서서히 목을 옥죄어 온다.


이미 덫에 걸렸다면 살아갈 방법은 하나 뿐이다.

시간이란 놈이 숨통을 끊어주길 간절히 기다리며 인생을 사는 것.

운이 좋아 옆에 풀어놓은 쥐약이라도 삼켰으면 좋으련만,

그 약마저 없으면 덫에 걸린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모든 시간을 사지로 견뎌야 한다.



녀석은 알고 있었을 게다.

반장으로 진급을 하면 어느 정도의 월급을 더 받는 지 말이다.

난 몰랐다.

고양이가 쥐의 식습관을 신경 써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녀석의 판단은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을 인생에 최소한 책임이 적은 일을 하며 죽음을 맞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인이 머리를 쓰길 싫어하고, 육체 노동을 좋아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난 그러한 어줍잖은 일반화에 세뇌당할 정도로 무식하지 않다.)


알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반장을 뽑아보겠노라 말했다.

녀석은 뻐드렁니를 보이며 나를 보고 웃었다.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착한 사람이 싫다.

예나 지금이나 

내 인생에 날 아프게 했던 사람은 모두 착한 사람들 뿐이었다.



난 쥐 덫에 걸리고 싶지 않다.

덫에 걸린 자들을 구해주고 대신 덫에 걸리고 싶지도 않다.

그들이 설계해 놓은 덫에는 쥐가 걸리지만, 고양이도 절대 예외는 아니다.

나 역시 덫에 걸리면 죽는다.

아직 어리고, 평범한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방법으로, 처절하게 죽어갈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죽고 싶지 않다.


그런 두려움이 쌓이고 쌓여 그들의 시스템은 더욱 견고해진다.

견고해지는 만큼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피고름까지 짜내야 한다.

그 더러움은 달러라는 신성한 물질로 변모한다.

모두 그 분들의 몫이다.


하지만 이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시스템에 그렇게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슬픈 기분이 든다.

나도 언젠가는 착했던 적이 있었을까?


지금 내 모습이 한 없이 더러워보이기 때문에,

난 아직 착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슬픈 기분이 든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관리일까?

착취일까?

언젠가 먼 훗날.

다가올 시대가 대신 판단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은행에서 현금을 찾았다.

내 계좌에는 꽤나 많은 액수의 달러와 6,300위안화가 있었다.

ATM기가 나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넌 아직 쥐가 아니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어.

쥐가 아니라고 해서 쥐 덫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니까.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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