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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120627) 지속 가능한 노름질

by 빛의 예술가 2012. 9. 26.

모처럼 연휴다.

이틀간 이 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한국보다 이 곳이 좋은 점 중 하나는, 한국에선 쉽게 갈 수 없는 곳에도 슬리퍼를 끌며 쉬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홍콩이나 마카오.



홍콩이나 마카오.

홍콩이나 마카오..

홍콩이나 마카오...



마카오로 결정했다.

결정은 빠를 수록 좋고, 생각은 없을 수록 좋다.

내 머리의 깊은 곳에서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도시, 마카오였다.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세계 각국에서 노름질과 분탕질을 행하러 온 사람들이 뿌려대는 돈으로 움직이는 도시.

그들이 슬롯 머신의 레버를 한번 더 당길 때마다 소비는 가속화되고, 그 만큼 꿈과 희망은 부풀어 오른다.

꿈과 희망의 팽창은 신자유자본주의의 밀도를 견고하게 만든다.

그들이 카드를 쪼으며 한 게임당 한 벌의 카드를 소비할 때마다 마카오는 그 특유의 매력을 더하며, 세계 경제 발전에서 자본이 점하는 위치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프로세스다.

세계 경제에 이바지 하는 박직하고 긍정적이며, 생동감 있는 프로세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사랑하고 섹스하고 생명을 잉태하는 것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과정임엔 틀림없다.

거대한 천민 자본주의를 단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지구 속 공간이기 때문이다.



난 여자 한명과 마카오에 갔는데, 그 밖에 어떤 사람들과 같이 갔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유령이나 이름없는 영혼따위.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우습게도 예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였기에 명칭은 생략한다.

"마카오에서 돈 번 다음, 베네치안 호텔 스위트룸 잡아 드릴게요"


웃는다.

웃는게 예쁜 여자다.



어쨋든 마카오로 가기 위해서는 홍콩을 경유해야했다.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고, 출발이 가능한 곳은 세 곳이 있었다.

장소는 침사추이를 선택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홍콩이 침사추이였기 때문이다.

방법은 페리를 선택했다.

대신, 마카오에서 이 곳으로 돌아올 때는 헬기를 타고 돌아오자고 약속했다.

웃는다.

웃는게 예쁜 여자다.



이미 해는 어둑어둑해졌으며 홍콩의 그다지 볼품없는 야경을 뒤로한 채 꿈과 희망의 세계로 출항했다.

신비의 섬을 찾아 떠나는 니모 선장처럼.

노틸러스호는 아니지만, 노틸러스의 최대 노트를 훨씬 넘어서는 최신형 페리를 타고.



1시간 쯤 달렸을까.

가장 먼저 마카오를 알린 건 핸드폰이었다.

통신사가 홍콩에서 마카오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생소하지 않은 명칭의 호텔에서 문자 메시지가 전송되기 시작했다.

읽던 도중 또 하나의 메시지가 전송된다.

또 다른 5성급 호텔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마자 또 다른 호텔에서 문자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가려고 마음먹었던 카지노가 있는 호텔이다.

슬립 버튼을 누르자마자 핸드폰이 켜진다.

카지노다.

이렇게 수 십개의 문자메시지가 내 핸드폰으로 전송되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마카오 땅을 밟기도 전에 해상에서,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오색 찬란한 건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있었다.

마카오 입국 스탬프를 찍은 다음, 어디로 갈 지는 자명했다.

모든 교통 수단은 호텔 셔틀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탑승객이 그 호텔의 투숙객이든 그렇지 않든 사실관계는 중요치 않았다.

검사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젖과 꿀이 흐르는 장소로 우리를 실어나르기 위해 분주히 일하는 기사와 최신식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호텔 몇 군데를 둘러보고, 몇 군데는 카지노까지 구경했다.

내 목적은 카지노였고, 그녀의 목적은 에그 타르트였다.

나는 조금 미안해졌지만 이미 해는 저물었다.

마카오에서 해가 저물었다면 에그 타르트를 먹으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카지노에 가야한다.

내가 굳이 그 단순 명료한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 것을 이해하는 여자였다.

웃는게 예쁜 것 만큼이나 머리도 좋은 여자였다.



종착지는 베네치안 호텔이었다. 

분명 실외는 밤이었는데, 그 곳으로 들어가자 시간은 낮으로 변모했다.

그 것도 이태리 베네치아를 그대로 옮겨둔 모습이었다.

실내였지만 하늘이 있었으며, 구름이 있었고, 강이 흘렀다.

곤돌라가 그 강을 지나고 있었으며 강줄기를 가로싸고 있는 것은 앤틱한 모양의 가로수였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온갖 명품관을 지나 별이 빛나는 카지노에 입성했다.



마카오 베네치안 호텔 카지노는 내가 지금껏 가본 카지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 천대의 슬롯머신이 줄 서 있었으며, 수 백대의 테이블 앞에 수 천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돈 냄새가 났다.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도 볼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욕망만 득실 거리는 곳.

오랫만의 카지노에서 

난 웃었다.



일급 비밀과도 다름없는 카지노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적지 않는다.

결국 내가 무슨 게임을 했는지, 어떤 방법을 통해 카지노를 상대로 승리했는지 적을 순 없다.

임계점과 절제따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의 게임을 흉내내다 패가망신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수 백, 수 천만불 정도 따고 돌아온 것인양 의기양양해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3천 6백불 정도

적당히 벌었다.



 꿈과 희망의 임계점을 잘 알고 있다.

그 임계점을 넘어서 버리면 그 것은 더 이상 꿈과 희망이 아닌 후회와 절망으로 변모한다.

그 날, 그 시간, 그녀와 함께 했던 카지노의 임계점은 3천 6백불이었다.

카지노가 말해주고 있었다.

"임계점은 3천 6백불이다."

그리고 난 3천 6백불을 벌자마자, 이기기 위한 게임을 중단했다.

예전 세부의 워터프론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미 밤이 늦었다.

약속한 것처럼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스위트 룸을 잡으러 갔다.

남자답게 '스위트 룸 두 개를 잡아야지'생각했지만, 호텔의 접수계원은 코웃음을 치며 룸은 이미 매진이라고 알려주었다.

얼핏 듣기로 3천개가 넘는 스위트룸이 존재하는 거대 호텔이었다.

매진이란 단어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이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크게 실망 했지만, 그녀는 상황을 이해했다.

모처럼의 연휴는 우리만의 연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밤 늦게까지 카지노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카지노를 하고, 스타벅스에서 함께 노숙을 했다.

3천 6백불을 딴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녀는 아주 조금 잃었는데 차마 달러를 줄 순 없었기에, 다음 날 맛있는 저녁을 사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린 부시시한 몰골로 마카오를 관광하고 돌아왔다.

밤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침이 되자 유령도시처럼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차가움 속에서 낮의 사람들을 만났고, 낮의 건물들에 입장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갔던 마카오지만, 꽤나 많은 것과 조우했다.

돌아오는 길 홍콩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물건을 샀다.

음료를 마시고 버스티켓을 구입하고 이 모든 것을 내 돈으로 지불했지만 돈이 남았다.

외려 출발할 때 보다 더 많은 지폐가 있었다.
(사실 출발할 때는 인민폐 500원이 전부였다)

마카오 밖에서는 쓰지도 못하는 마카오 화폐인 파타카까지 지갑에 껴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함께 웃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 아직 내 지갑 속엔 달러와 파타카가 조용히 꽂혀있다.






돌아오는 길 홍콩, 그녀와 나는 그 이야기를 했었다.


"참.. 우리 마카오에서 에그 타르트 못 먹었다. 그쵸?"

웃는다.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다.


대답한다.

"헬기 타고 돌아오는 것도 깜빡했네요."

웃는다.

지속 가능한 노름질은 있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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