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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121217) 낭만적 밥벌이

by 빛의 예술가 2012. 12. 17.

'귀국'


한국이다.


아주 조금 걱정했던 Re-entry Culture Shock도,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며 두리번 거리는 일 따윈 없었다.


내가 살았던 한국이다.


외국에서 몇 년간 떠돌다 왔다 하더라도 온 몸의 세포가 이 나라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지갑에는 이 곳에서 쓸 수 없는 지폐가 무작위로 꽂혀있지만, 난 능숙하게 세종대왕이 인쇄된 지폐를 꺼내 계산을 했다.


기특했다.




'사장님'


종업원을 부를 때 Hello라고 하지도 않았고, 服务员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난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곧 사장님이 된다.


그 전까지 이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카페를 찾던 중 종로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내가 한국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거리다.


종로 2가 어딘쯤, 거대 자본에 의한, 중고서점이란 것이 생겼다고 얼핏들었는데 역시나 대로변에 떡하니 위치하고 있었다.


거대 자본이 이제 중고책도 사고 판다고 생각하니 비참해졌다.


2004년 인도양을 휘감은 채 섬으로 질주했던 거대한 파도 물결처럼, 거대자본이란 녀석은 이미 온갖 것에 손을 대고 있는 중인 21세기 한국.


그렇게 오지랖 섞인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알라딘 중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인테리어'


지금 내 생활의 화두는 커피와 인테리어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인테리어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지랄 맞을 정도로 비싸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비용을 줄이기 위한 온갖 방법을 물색하고 있는 찰나, 알라딘 중고 서점은 가히 충격적인 비쥬얼로 내게 다가왔다.


동대문 평화 시장이나 청계천, 인사동 길을 걸을 때마다 힐끗거리던 그런 중고 서점이 아니었다.


예뻤다.


난생 처음 접한 듣도 보도, 생각지도 못했던 알라딘 중고서점은 내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책을 팔려면 번호표를 뽑으세요, 마치 은행에 가서 돈을 맡길 때 처럼'


'온도는 적당하세요? 밖은 굉장히 춥지만 안은 첨단 공기 청정 시스템과, 온습도 관리 시스템으로 무장해있으니 걱정마세요.'


'다리가 아프시면 여기 앉아서 책을 읽으세요, 저희 서점은 계단식 벤치를 적극 활용해 좁은 공간이지만, 많은 분들이 편하게 앉아 독서하실 수 있도록 배려했답니다.'


'참, 마시던 테이크 아웃 커피 컵은 이 홀더에 놓아두세요, 저희가 치워 드리겠습니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세요? 그럼 도서 검색대에 가시면 구역별, 층별로 재고 수량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하실 수 있어요. 물론 도서 검색대에 가지 않으셔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면 바로 검색이 가능하지요.'



내가 아는 우중충하고 곰팡내가 풍기는 중고 서점이 아니었다.


그렇게 최신식, 최첨단으로 무장한 중고 서점이 이미 내 눈에 들어왔다.





'낭만적 밥벌이'


결국 난 그 곳에서 중고 서적 2권을 구매했다.


두 번 읽어봤던 '우리 까페나 할까?', 그리고 라디오에서 얼핏 들었던 '낭만적 밥벌이'가 그 것이다.


책의 상태도, 가격도 적당한 수준이었다.


책 두 권에 9,200원.


로버트 그린의 유혹의 기술이 있길래,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나같은 여행자에게 이 책은 두꺼웠다.



낭만적 밥벌이는 카피라이터로 일을 하던 필자가 20년 지기 친구와 카페를 창업하는 이야기다.


꽤나 오랫만에 읽은 한국 책이라, 처음에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필자 직업 특성상, 속삭이듯 말하는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인상과는 달리, 읽고나서는 조금 후회가 되었다.


얻을 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엔 배움이 깃들여있는 법,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감탄했던 부분 두 문장을 베껴 적기로 한다.



p.89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는 열린 공간인 카페보다 닫힌 공간인 도서관의 열람실 내지는 집이 더 적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순전히 키키봉만의 추측이지만 사람의 심리가 닫힌 공간에서 열려 있고 열린 공간에서 은밀하고 싶은 건 아닐지...


p.231 잡지 <페이퍼>와 인터뷰 때 우스갯소리로 '낭만의 적, 밥벌이'란 표현을 했던 것처럼 낭만이 밥벌이로 전락하긴 쉬워도 밥벌이가 낭만적으로 되게 하려면 끊임없는 도전이 필수적이다.




얻을 게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유를 생각해봤다.


이미 내가 필자의 초창기 시절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경계했다.


'삼인행필유아사'의 의미처럼, 모든 것에는 가르침이 있다고 믿는다.


낭만적 밥벌이.


난 지금 낭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와 내가 동일시되는 장면이 꽤나 존재했기 때문에, 기분좋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세상엔 나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구나.'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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