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나는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날고 있다.
희미하게나마 월광이 비춰줬으면 좋았으련만, 날씨가 흐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화려한 스카이라인도, 밤 하늘의 별도, 저 멀리 파도를 견디고 있을 희미한 등대 불빛도, 모두 어둠에 가려 찾을 수 없었다.
믿을 것은 경비행기의 조종관, 그리고 나의 직감 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의문
나는 어떠한 이유로 날고 있는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이륙한 상태의 경비행기와 조종관을 부둥켜 앉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내 의지로 날아오르지 않았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날고 있었고, 내부의 유리창은 온통 암막 커튼에라도 가린 양 어떠한 빛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난 혼자였다.
난기류
일순 나와 경비행기가 동시에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난기류에 빠졌을까?
미친듯이 떨리는 조종관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고도를 높였다.
이대로 나의 비행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조종관을 움켜쥔 손에서 땀이 산발적으로 튀었다.
미친듯이 안구를 돌려봤지만 난 어느 곳을 기준으로 균형과 고도를 맞춰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귀다.
균형 감각을 잡는 역할은 내이(內耳)가 한다.
하지만 절박하게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선 한 치의 균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덜컹덜컹.
매정한 기류는 나의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심하게 동체를 흔들어댔다.
그렇게 1분 정도 지났을까, 덜컹거림이 멈추고 나는 다시금 어둠 속으로 천천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난기류를 만나지 않기를 기대하며, 줄곧 이대로 평탄한 기류에 휩쓸려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빌었다.
두 번째 의문
다시 의문이 들었다.
대체 내가 왜 날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어디까지 날아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멈출 수 있다.
게다가 이 곳이 태평양 위인지, 알래스카 산맥 위인지 난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이대로 이 곳에 착륙해도 살 수 있는건지, 착륙과 즉시 내 비행이 끝장나는건지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게 의문을 가질수록 어둠은 더욱 그 밀도를 견고히 하며 나와 비행기를 움켜쥐었다.
계기판
정신을 차리고 계기판을 들여봤다.
자동차 계기판과 별 다를 것 없는 각종 게이지와 버튼이 눈에 보였다.
잠깐, 자동차 계기판?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고 느꼈다.
난 분명 날고 있는데 고도를 알 수 없었으며,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지, gps상 어느 지점을 비행하고 있는지 그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
오로지 속도와 라이트 점멸 스위치, 그 밖에 시시껄렁한 버튼이 전부인 계기판이다.
나는 분명 조난을 당한 것이다.
멀쩡하게 날고 있는 경비행기 안에서 조난을 당한 것이다.
목이 찢어져라 메이데이를 외칠 마이크도, 구조와 관련된 버튼 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 비행기에서는 비상탈출 레버를 찾을 수 없었다.
동행기
등골에서 식은 땀을 흘리며 계속해서 비행하던 중, 세 번째 의문이 들었다.
세 번째 의문
난 어떻게 경비행기 안에 속도/고도/gps따위의 장비가 장착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분명 이 전에 경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나란 존재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이 비행기는 날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제대로 짜맞춰지지 않은 계기판에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대체 왜 내가 타고 있는 경비행기는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는 걸까?'
동행기 2
갑자기 천둥과 같은 섬광이 일었다.
순수한 어둠 속을 꿰뚫는 빛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밝았다.
고개를 돌려 뜬 실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또 다른 경비행기를 발견한 것이다.
이 상공에 나 혼자만이 비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난 일말의 안도감과, 약간의 경계를 품으며 또 다른 비행기를 따라 선회하기 시작했다.
graveyard spiral
그 비행기는 이상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상한 지도 모른다.
분명 내 시야에는 양 날개의 균형이 맞지만, 계속해서 왼쪽 날개를 아래로 꺾고 있었다.
어쩌면 내 비행기의 우측 날개가 꺾이고 있는건지 모른다.
위험했다.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둘 중 하나는 비틀어져있다.
난 동체의 균형을 잡기 위해 빛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빛도, 별빛도 이 하늘에는 없었다.
수평선도, 지평선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내 비행기의 라이트와, 알 수 없는 비행기의 라이트.
두 빛의 흔들림으로 균형을 잡아야 했다.
분명, 1분도 채 가지 못해 두 기 중 한 기는 graveyard spiral에 빠진다.
그리곤 미친듯이 회전하며 아래로 추락한다.
난 분명 평균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측을 봐도, 좌측을 봐도 분명 안정된 비행이었고, 속도도 아까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내 눈앞의 비행기는 아직도 좌측 날개를 아래로 비틀고 있었다.
구심점을 찾을 수 없었다.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대체 무엇을 보고 균형을 잡아야 할 지 까마득해졌다.
graveyard spiral에 빠진 것이라면 바닥에 볼펜을 떨어뜨려도 어느 한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고, 가운데 멈춰 서 있을 것이다.
내가 균형을 맞춘 상태라도 마찬가지다.
그래, graveyard spiral에 빠져버리면, 신체의 평형감각기마저 마비가 되어버린다.
삼반규관안의 림프액이 회전에 적응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난 북극성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며, 도구, 나아가 내 자신의 감각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내가 죽든지, 저 녀석이 죽든지,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는 조금 더 오래 균형을 유지한 채 살아갈 수 있다.
추락
식은땀이 흘러 조종관을 잡은 손이 계속해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승자가 판가름 났다.
내 눈앞의 비행기는 내 눈이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회전, 회전, 회전, 그리고 강하
회전과 강하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 비행기의 조종사는 날개의 좌현을 계속 아래로 고정시켰다.
graveyard spiral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그 비행기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추락했을까?
추락했다면 일순 섬광이 일지 않았을까?
난 한 줄기의 빛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곳은 바다일 확률이 높다.
혹은 내 비행기는 산맥을 넘어섰고, 녀석은 산 중턱에 추락해버렸을 것이다.
계속해서 이름조차 모를 그 비행기와 조종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 아무런 굉음조차 듣지 못했다.
그럴 리 없었다.
바다에 추락했다고 하더라도 천둥같은 굉음이 들려야 정상이다.
내가 산맥을 넘고, 산 중턱에 추락 했을 지라도 뒤쪽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일어야 정상이다.
녀석은 추락하지 않은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graveyard spiral에 빠진 비행기가 녀석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비행한다.
방향성은 찾을 수 없고, 목적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난 회전하며 추락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계속해서 비행한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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