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왔다.
회사를 뛰쳐나온 난 세렝게티를 떠도는 얼룩말과 같았다.
'여기까지는 좋다.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선이 임계점이다. 더 이상 내게 강요한다면 난 당신들 곁을 떠나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다.'
그와 동시에 얼룩말은 외로움을 탄다.
오랫만에 돌아갔던 뜨거운 남국의 섬에서 겪었던 기분은, 수년 전 지리산자락 이름 모를 찜질방에서 겪었던 극한의 고독과 동류의 것이었다.
내 옆을 춤추며 지나가는 사람에게서도, 어쩌면 내 곁에 누워 나를 바라보고 있던 존재에게서도, 내게 돈을 받고 음식을 내어주는 이름 모를 낯설음에서도 난 고독을 느꼈다.
역설이다.
내게 있어 방랑과 고독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띄처럼 무한히 얽혀있었다.
무수히 많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무수히 많은 존재와 손을 잡았던 것은 그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지도 몰랐다.
2012년의 마지막 달을 바라보게 되었다.
시퍼런 월광이 새하얀 눈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 역설적인 얼룩말이 나라면,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바라보기로 했다.
얼룩말의 행진이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사자와 하이에나도 보였다.
나와 함께 하는 얼룩말들은 사자와 하이에나에게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고 있었다.
그 밖에 누와 가젤, 일런드, 영양들이 우리와 함께 걷고 있었다.
그 행진 속에서 나를 찾았다.
나는 얼룩말이었고 초원을 두리번거리며 사자와 하이에나, 자칼을 감시하고 있었다.
놈들은 밤이되면 월광에 반사된 시퍼런 빛을 내며 우리의 행진을 경계했다.
난 외로웠고 그와 동시에 떠나야 했으며, 놈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2012년의 마지막 달은 온전히 둥근 보름달도 아니었으며 어딘가 조금 찌그러진 상현, 아니 하현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자칼떼가 우리를 습격했다.
우리 얼룩말 떼는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가젤 군단의 몇몇이 처참히 찢겨나갔다고 한다.
어쩌면 이 초원을 질주하는 공동체인 우리 중 일부가 녀석들에게 짖밟혔다는 소식은 그리 새롭지 않았다.
약자였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탐하지 않는 우리들은, 짧은 역사가 말해주듯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그 것이 자의든 타의든 우리가 약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2012년의 마지막 달은 천천히 이동했다. 그럴 리 없었지만, 달은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세렝게티 안에서도 먹음직스러운 풀이 끝없이 펼쳐진 그 곳을 발견했을 때 나는 얼룩말 가족과 누, 가젤, 일런드 친구들에게 말했다.
'전 이제 세렝게티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깊은 옹달샘이 있는 이 곳을 떠나겠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은 나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하는 그들은 나의 안위가 걱정 되었을 게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가젤의 선지자라 불리던 예언자 가젤이 내게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보게 젊은 얼룩말, 이 세렝게티를 떠난다면 목적지는 어디인가?'
나는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세렝게티가 아닌 곳입니다.'
그가 말했다.
'난 예언자라네. 가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지. 이 세상은 세렝게티와 다를 바 없어.'
내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세렝게티 밖을 떠돌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세렝게티가 아닌, 그 곳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했다.
'목표는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했다.
'먼저, 한 마리의 초식동물로 태어난 제가 언제 무엇을 할 때 기쁘고, 어디서, 어떤 일을 겪을 때 슬픈지 알고 싶습니다. 나아가 왜 살아야하는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지 찾고 싶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직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찾지 못했단 말인가? 가엾은 젊은이'
내가 답했다.
'이 곳 세렝게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 그 한계를 벗어나 또 다른 곳에서 제가 진정으로 어떻게 생겨먹은 얼룩말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판단하려 합니다.'
예언자는 내 눈을 골똘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뚜벅뚜벅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달이 보였다.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자와 하이에나, 자칼에게 맞선 육식 얼룩말이 될 테니 말이다.
'단상(斷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0213)진실의 배격 (0) | 2013.02.13 |
---|---|
(130211)graveyard spiral (0) | 2013.02.11 |
(121217) 낭만적 밥벌이 (0) | 2012.12.17 |
(121011) D-51 (0) | 2012.10.11 |
(120919) 사직서와 라이트 블루 (0) | 2012.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