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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20090523)Pretend

by 빛의 예술가 2013. 4. 16.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뒤이어 남자손님이 들어온다.

 

두 사람은 머뭇거리더니 바 탑에 앉는다.

 

난 직접 주조한 깔루아 밀크를 홀짝이며 그들을 응시한다.

 

바 탑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불륜이다.

 

깔루아 밀크를 마시는 내 눈에는 그 것이 보인다.

 

코웃음치며 메뉴판을 들고 그들 앞으로 다가간다.

 

남자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무시하고 여자를 바라본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가설 성립.

 

 

 

"주문하시겠습니까?"

 

"맥주 3병 가져와"

 

기본은 되어있다.

 

심화학습이 필요한 손님이다.

 

"어떤 맥주로 가져다드릴까요?"

 

"아무거나"

 

깔루아밀크를 마신 직후이기 때문에 하이네켄를 선택한다.

 

하이네켄 3병을 가져다주자 남자가 손으로 마개를 돌려따려한다.

 

제지해야한다.

 

"손님, 하이네켄은 트위스트 캡이 아닙니다."

 

오프너를 건넨다.

 

 

남자는 나를 2초간 응시한 후 순순히 오프너를 받아든다.

 

"야 재떨이 가져와"

 

아마 그때부터 내 기분이 나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바의 아래에 있는 재떨이를 건넨다.

 

 

남자는 내가 없어지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난 손님을 접대해야할 의무가 있다.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손님일지라도 말이다.

 

 

그런식으로 세 사람의 대화는 시작된다.

 

나는 프로다.

 

평소에는 말하지 않아도,

 

말을 해야하는 상황에 닥치면 그 누구보다 말을 잘 할 수 있다.

 

싫어하는 사람과도 능란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최대 장점.

 

 

그 때 여자가 내게 말했다.

 

"학생, 정도(正道)를 걸으세요."

 

"정도라면 어느 부분에서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예를들면..."

 

그렇게 두 사람만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남자는 배제되어있다.

 

나는 남자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조금의 틈도 주지 않는다.

 

소심하게 표현한다면 재떨이의 복수다.

 

 

20여분이 흘렀을까

 

안절부절 못하던 남자의 입에서 말이 터져나온다.

 

"야, 너 그냥 돌아가"

 

여자가 말한다.

 

"왜 그래? 재밌게 얘기하고 있는데."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응시한다.

 

 

이내 남자는 지갑에서 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든다.

 

"돌아가."

 

난 웃으며 돈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곧장 화장실로 가서 세어보지도 않은 지폐를 찢어버렸다.

 

변기에 찢어진 지폐를 버리고 물을 내린다.

 

 

 

난 다시 돌아간다.

 

처음에 있던 그 장소로.

 

마시던 깔루아 밀크가 2cm정도 남아있었으며, 여자는 드디어 취한 듯 남자의 품에 안겨있다.

 

다른 손님들이 몇몇 있었지만 무시한다.

 

나는 줄곧 여자가 말한 '正道'에 대해 생각하며 깔루아밀크를 마셨다.

 

 

 

 

 

이 이야기를 깜빡하고 넘어갈 뻔 했다.

 

여자는 내게 금전의 정도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학생, 쉽게 번 돈은 쉽게 써버리는거야. 돈이라는건 차곡차곡 벌어서 조심스럽게 쓰는거야."

 

"그게 금전에 있어서의 정도입니까?"

 

"그래.. 돈이란건 그런거야."

 

"잘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난

 

그날 팁으로 받은 만원짜리 지폐를 모두 화장실에서 찢어버리고

 

웃을 수 있었다.

 

 

 

Fine.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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