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길 외곽을 걷던 중 당신을 발견한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놀란다.
이런 거리에서 당신과 내가, 이런 방식으로 재회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어김없이 나를 붙잡아 세운다.
난 언제나 당신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이 부러웠다.
세상이 내 몸을 짓누르는데 성공했을 지라도 내 눈빛만은 쉽사리 정복할 수 없을 거라는 자만자족.
뒤집어 쓰고 있는 모자는 양쪽 귀퉁이가 헤졌고 앞쪽 모서리는 빛이 바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다.
수염은 2주일 정도 자르지 않는 듯 보여 흡사 고슴도치를 연상케 하였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적나라한 머리카락은 그의 자시를 더욱 도드라지게 꾸며줬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기생하는 작은 충이며 엉겨붙은 비듬은 눈살조차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당신은 내게 말을 건네기 전 히죽거렸다.
히죽...?
미안하다, 히죽이란 표현은 당신의 웃음에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당신은 내게 생긋 웃고 싶었을게다.
생긋..
조금 더 정확하다.
그렇게 웃음 짓는 당신의 이 사이에 끼여있던 정체모를 음식물 찌꺼기와 삽시간에 내 후각을 장악해버리는 소주 냄새는 이변이 아니었다.
그렇다.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 때 난 당신의 손도 보았다.
나 역시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는 인간이기에 당신의 손을 잡아주지 못한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단연코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이유는 타르에 탈색당해버린 오른쪽 검지와 중지가 도드라져보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손톱 정리를 해야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당신의 양 손이며 어디서 얻은건지 짐작하지도 못할 영광의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서서히 침략해가는 핏덩이와 딱지의 향연 때문도 아니다.
세월의 흐름을 무색케하듯 당신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손의 주름살 때문도 아니었다.
콧구멍에 잔뜩 끼어있는 고름과도 같던 코딱지와 이미 인중 사이에서 말라버린 콧물흔적은 더더욱 아니다.
추운 겨울 매서운 바람이 입술에 존재하던 침을 사방으로 날려놓아 거북이 등짝처럼 메말라버린, 그리하여 핏자국이 선연하던 당신의 입술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주지 못한 이유는 당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있던 반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내게 말했다.
"쩌기요 아저씨, 찐짜로오 배가 고파서 그러는디이 천원짜리 따아~악 한 장만 빌려주이쏘."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했다.
반지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그 반지를 구태여 착용할 필요는 없다.
팔아버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 반지를 지키려다 당신 목숨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천원을 주면 당신은 소주를 사 먹을 수 있겠지만, 그 반지를 팔아먹으면 앱솔루트 보드카를 사먹을 수 있다.
그렇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추운 겨울 따스한 햇살 아래 나는 당신과 재회했다.
청아한 바람이 청풍으로 변해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당신은 어디에든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다.
이런 역설이 허용되는 순간이 있음을 나는 배웠다.
진정으로 당신은
어디에든 존재하고, 또 어디에도 존재치 아니하였다.
현존재의 선험적인 구조로서 다른 존재와 함께 하는 또 다른 존재.
그 것이 당신과 당신의 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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