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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20100512)빛의 예술에 관하여

by 빛의 예술가 2013. 4. 16.

내가 태어났을 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어머니께서 예쁜 나와 악마와 같던 누나를 찍어주시기 위해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사진기를 구입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돌사진에는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통통한 천사가 찍혀있다.

 

그 천사의 손에는 성냥갑이 쥐어져있는데, 통통한 두 볼이 상기되어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아기천사는 울보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세상이 끝장났어야 할 2000년.

 

난 토이 디지털 카메라를 선물로 받았다.

 

한국에 디지털 카메라가 유입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던 과거다.

 

렌즈를 교환할 수 없고, 라이브 뷰 기능을 지원하지 않았으며, 찍은 사진을 즉석에서 볼 수 없었고 그 사진 마저도 서른장밖에 찍을 수 없다는 소소한 단점이 있었지만

 

사진기는 필름이 필요한 기계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있던 그 시대상에 비추어 본다면 혁신적인 물건을 들고다니던 중학생이었다.

 

난 그 사진기를 들고 우리나라를 일주하기 시작했으며

 

서브 카메라를 따로 들고다녔던, 다시 말해 두 대의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까까머리 학생을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기술의 S-curve에 반응하듯 디지털 사진 역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난 새로운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게 된다.

 

2003년.

 

Canon의 Power shot A Series

 

모델명까지 기억한다. A70

 

그리고 나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사진기에는 이름까지 있었다는걸 기억할 수 있는데

 

"칠공이"라는 아주 세련되고 아방가르드한 이름이었다.

 

 

나의 두 번째 사진기는

 

보급형 사진기였지만 수동모드를 지원하는 위대한 사진기였으며

 

앞쪽에 컨버터를 장착할 수 있어 온갖 필터는 물론, 망원렌즈와 광각렌즈까지 사용할 수 있는 무적의 사진기였다.

 

하지만 기술의 S-curve는 계속해서 진행중이었다.

 

전설과도 같은 사진을 찍었던 칠공이는 나와 함께 했던 무수한 여행을 뒤로한 채, 수 만 장의 작품을 끝으로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나는 검은색의 육중한 사진기를 한대 더 구입했다.

 

나의 세 번째 사진기.

 

당신들이 볼 수 있는 지금의 내 사진기다.

 

 

 

듣고싶지도 않은 당신의 사진기 구매 이야기를 왜 털어놓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다.

 

내일은 어학연수 면접이 있고, 국제마케팅 수업이 있고, 교학관 2층에서 행하는 지옥의 근로가 있으며 사진수업의 중간과제 모임이 있다.

 

그런데 가장 신경쓰이는 것이 사진수업의 중간과제 모임이라 하면 당신들은 믿겠는가?

 

 

 

정식으로 사진수업을 들으며 사진을 찍는 행위가 불쾌하다고 느꼈었다.

 

10년동안 사진을 찍어온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변화였다.

 

사실 난 굉장히 편향적이고 편협한 시각으로 사진을 찍는다.

 

예를 들자면 내가 좀처럼 자화상을 찍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따위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사진수업은 순수한 절망 그 자체다.

 

매주 나를 노려보는 렌즈를 버티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었으며 비쾌락적 소모전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속에 내가 속해있을 수 없듯이,

 

자화상을 찍어대는 작가들은 얼간이임에 틀림없다.

 

그건 이미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해 있는 이 공간을 찍기 위해선 나의 사진기가 필요치 않다.

 

하지만 내 철학과는 별개로 사진학 교수는 반론한다.

 

 

"그렇지 않아."

 

 

그래, 언제부터 세상이 내 멋대로 돌아갔더냐

 

나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입장도 포용해야함이 정론이지만

 

사진에서 만큼은 내 칼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타인에 의해 규정된 사진이라함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10년이나 사진을 찍은 사람 치고는

 

지나가던 매점 고양이&강아지가 코웃음을 칠 정도의 수준이지만,

 

오늘도 난 사진을 찍는다.

 

 

이미 내 사진은 나의 역사와 동의어가 되었으며

 

잊혀져가는,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의미를 조금도 퇴색시키지 않은 채 기억할 것이다.

 

 

 

 

 

 

무언가를 10년동안 지속해서 행한 나를 칭찬해주고 싶은 밤이다.

 

곰곰히 쳐다보면 나도 칭찬할 거리가 있는 인간이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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