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레인맨을 관람한 이후 사흘째 쏟아지는 비를 보며 영역에 관한 생각을 했다.
사자는 나무 밑둥을 손톱으로 긁어내 영역을 표시하고
개는 배설물의 연장선상에서 영역을 그려낸다.
물론 인간도 영역표시를 한다.
사자나 개처럼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자본을 이용한 자아의 객체화 혹은 수단화를 위한 총체적 행위로써 배타적 이면에 존재하게된다.
이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어디 있을까?
당신이 심도있게 의려해봤자 속류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그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영역을 소유하기 위해선 자본이 필요하게 된다.
물론 자본은 로동을 통해서 얻어야만 한다.
이 논리에 검열의 잣대를 가하거나, 비판의 눈초리를 견지하지 않았으면 한다.
로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자본의 개념은 수 천년 동안 지구인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였으며, 무로동 자본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한계로동이 투입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로동은 촉매제 혹은 메타포의 개념으로 자본에 귀결된다.
빌리 마이어스가 부르는 'kiss the rain'을 들으며 비와 잠깐동안 키스한다.
그랬다.
현재 나는 공허했다.
게다가 공허한 자아를 세상 속에 띄워놓은 채 로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해 허공속에 배설을 해대고 있는 작태였다.
필요한 것은 3초도 생각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텅텅 비어있는 내게 필요한 그 것 말이다.
다량의 수분을 섭취해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포름알데히드, 타르색소, 알코올,
인간의 분비물이 중첩된 도서관의 책
몇 번정도 필터링 되어 들려오는 음악
서로 다른 생각에 서로 다른 가면을 바꿔치기하며 맺는 관계
모든 것에 의미를 찾을 수 없었으며 또 찾을 수 있었다.
그 것이 공허했다.
내게 자본을 위한 로동은 필요했으며 또 필요치 아니하였다.
류의 소설처럼 머리의 회선을 끊어버린 채 불특정 소수의 선택된 여자와 부둥켜 안고, 그녀를 비틀어 나를 채워가는 과정은 무의미하다.
그랬다.
세상 만물이 내게 정답을 말하고 있었다.
공허한 내게 필요한 것은 로동이나 자본의 기본원리가 아니었다.
피가 수반되지 않는 혁명에 정당성이 없듯이
바보들의 행진에 바보들은 없듯이
허공에 내지르는 공허한 외침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 모든 것이 존재했다.
당신의 망막속에서 순식간에 읽혀졌다 순식간에 잊혀져가는 이 글은
당신을 위한 글이 아니다.
또한
당신을 위한 글이 된다.
허공 속 영역을 그려대며 방향성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뻗는 내 손을 잡아달라는 공허한 외침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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