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궁금증과도 같은 이 문장이 언젠가 내 몸을 산화시킬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과 같이 멋드러진 수식으로 당신을 만나고 사랑을 시작할 확률을 계산하진 못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시간을 짓뭉개는 일련의 행위로 사랑의 문장을 체구할 수는 있다.
그리고 당신과 내가 어느 화창한 날 손을 잡고 길을 걸을 때 벤자민 브리튼이 지휘하고 잉글리쉬 챔버가 연주하는 Brandenburg Concerto No.3 in G major가 흘러나오지는 않겠지만 공원 관리소의 관리인이 틀어놓은 FM에서 해이의 ...가 흘러나올 확률은 있을거라 생각한다.
어젠 군복을 입고 산길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군화가 참 무겁구나'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바라보는 풍광은 엉망이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고, 해가 내리쬐는 것도 아니었다.
나무를 봐선 지금이 가을인지 봄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며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빨간모자를 쓴 사람들은 눈물나게 불쌍해보였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이 옷차림으로 다시 한번 철원에 가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설일 수도 있지만 내 생각엔 조금의 역설도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방에 들어와 군복을 벗고 정장을 입었다.
우스꽝스러웠다.
그리곤 천천히 넥타이를 매기 시작한다.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시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맨 정신에 넥타이를 매는법을 배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게 가능한 사람은 정말 지독한 사람임에 틀림 없다.
상상력이라고는 권문경만큼이나 없는 그런 황폐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난 적당히 술에 취한 채 넥타이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린다.
비참했다.
예전 자동 넥타이를 목에 달았을 때 처참했던 기분이 떠올랐다.
언제까지 찢어진 청바지만 걸치고 다닐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세상을 우습게 보고, 배불뚝이 아저씨들을 폄하했으며, 정권을 분쇄하려 시도하고, 머리를 기르고 기타를 연주한 모든 행위
그 모든 것들이 생각났다.
개별 행동들은 죄악이었다.
성서에 그렇게 적혀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우습게 보고, 배불뚝이 아저씨들을 폄하하고, 정권을 분쇄하려 하고, 머리를 기르고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 원죄다.
original sin
하지만 우습게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태극기보다 조금 더 자랑스러운 내 모습을 보며 광인처럼 낄낄거렸다.
그리고 오늘,
빌려신은 구두가 맞지않아 오른발이 피범벅이 된 채로 이 공간에 돌아온다.
오른발을 절뚝거리며 코엑스를 질주했지만, 아무도 날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넥타이를 맨 절뚝거리는 별 볼일 없는 기계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치즈김치볶음밥이란 이름의 연료를 주입하고 다시 걷기 위해 철컹철컹 걸었다.
주먹보다 더 큰 헤드폰을 귀에 두르고 맥주병을 빙글빙글 돌리며 거리를 걷던 나는 없다.
쉬폰 원피스에는 군화를 신어야 제맛이라며 웃던 너 역시 이 곳에 없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던 그 남자도 이 곳에 없으며
군인은 그 자체로 죄악이라 말하던 그 여자 역시 이 곳에 없고
세상 만물들에게 엿을 먹여야한다던 당신조차 내 곁에 없다.
모두가 손을 맞잡고 하하하 웃을 수 있는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아니했다.
그래서 난 현실을 부정하며 동화 속에 당신을 가두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당신과 당신, 그리고 당신과 나는 동화 속에 존재하는 조연들이다.
어떤 동화 속의 조연으로 살고싶냐고 물어본다면 당신들은 이렇게 대답할게 뻔하다.
'백설공주'
'라푼젤'
'푸른수염'
크게 웃는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묻고싶어진다.
동화 속에서 바라보는 내 모습은 얼마나 역겨운지,
당신들은 왜 나를 놓아주지 않는건지,
지금 날씨는 왜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건지,
그리고
내 사랑인 그대들이,
동화 속에서는 행복한건지
묻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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