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읽었다.
어느 날에는 방에 틀어박혀 책장을 넘겼으며
어느 날에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장을 넘겼다.
사랑을 하게되면 극한의 고독을 느낄 수 있다는 어떤 가수의 말처럼
좌에서 우로 활자를 쫒는 내 눈에는 고독이 묻어났다.
바람이 불어 계절이 변화하듯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마다 고독은 그 농도와 깊이를 천천히 더해갔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읽는 책은 일품이었다.
내가 써갈겨대는 이 문장을 글이라 말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나의 글은 태반이 암호로 이루어져있으며, 해석할 수록 복잡해지는 미노타우로스 신화 속 크레타 미궁을 닮아있다.
자연스럽게 나의 암호화된 글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당연히 나는 그런 사람들을 분간해낼 수 있다.
절반이 역설이고, 그 밖에 각종 오류를 담고 있는 암호화된 활자들의 집합은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음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 내게
나의 글이 좋다고 칭찬했던 여자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휘갈겨 대는 글에 등장하는 모든 3인칭 이성 주체는 기억할 수 있다.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쓴 문장이라 해도 당연히 기억이 난다)
그 중에는 헤어진 여자도 있으며, 헤어진 여자도 있고, 헤어진 여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더불어 그녀가 날 사랑했었는지 혹은 내가 그녀를 사랑했었는지에 관한 간단한 사실의 유무조차 판단할 수 없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나와 그녀는 어떤 관계였을까 고민해본다.
아직 그녀가 내 글을 읽으며 과거를 추억하고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어쩌면 나는 가장 중요한 기억의 일부를 상실한 채 호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가지 말아요, 여기 있어요'
마치 정신분열의 현상처럼 기억나지 않는 기억이 떠오른다.
왜 나는 떠나려고 했으며, 그녀는 날 잡으려 했을까?
눈을 감자 익숙한 향이 떠오른다.
샤넬 특유의 독특한 향이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며 여자에게 샤넬 no.5를 선물해준 적이 없다.
기억은 샤넬향과 떨어지는 눈물이 뒤범벅된 채로 조각난다.
내 여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pretend라는 영어 단어가 계속 떠올랐으며
붉은색 목도리가 기억났다.
겨울이다.
나는 하이네켄을 마시고 있었으며,
그녀의 입술에선 코스모폴리탄의 향이 났다.
예각으로 다듬어진 손톱은 붉은 색이었고,
내게 무언가를 보여달라고 했었다.
fade away
데이터가 부족하다.
어쩌면 맥주가 필요한 밤이다.
당연히,
결과는 산출되지 아니한다.
어제 해풍을 맞으며 마셨던 below zero beer는 무척 맛있었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농담을 들으며 화창하게 웃을 수 있었고,
몇 번인가 맞장구치며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해풍과 기억나지 않는 그녀, 그리고 나의 글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또 다시 고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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