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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잡문(旅行雜文)

여행의 가치와 그 비교 가능성에 관하여

by 빛의 예술가 2013. 7. 27.


시타르를 연주하고 있는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내 숙소 바로 맞은편 방에서 울려퍼지던 시타르 소리의 주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서 한 번, 나의 작은 삼촌 뻘 정도 되 보이는 범상치 않은 외모에서 두 번, 놀랐다.


나는 한국 사람을 폄하하는 것도, 나이 든 남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초연해 보이는 분위기와 생 초보가 연주하는 듯한 어설픈 시타르 소리, 두 가지가 연계되지 않았을 뿐이다.


좋게 말해도 '배운지 얼마 안되셨나보네요?'란 인사치레밖에 나오지 않는 그런 연주였다.




어느 순간 그 남자는 내 방을 힐끔거리더니 내게 차를 마시자고 권유한다.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마침 목도 말라오고, 얘기할 상대도 필요했던지라 초대를 흔쾌히 수락한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의 방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으려니 그는 차기를 꺼내고 찻잎을 고르고, 포트기에 물을 얹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남자는 전기포트기를 가지고 여행 중이었다.)


다도가 적당히 몸에 배어있는 남자였다.


처음 우려낸 물로 잔을 흠뻑 적셔 씻어내는걸로 보아 중국에서 차라도 공부하셨나?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묻지 않는다.


이렇게 찻잔을 씻어내는 것이 비단 중국 뿐만이 아닐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조금 쓴맛이 나는 보이차다.


그리고 남자는 내게 여행의 가치와 그 비교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류의 말들이었다.


과감없이 베껴적는다.




"요즘 인도에 어슬렁거리는 애들이요? 죄다 딸딸이나 치고 있는거예요. 지미럴"



"그런데 사진 찍으시나봐요? 지나갈 때 보니까 망원 큰거 하나 메고 다니시던데. 그렇게 목적이 있어야지 요즘 애들은 참.."



"저도 그래서 여행 접었어요. 세상 다 똑같애. 3천미터 넘어가고, 5천미터 넘어가는 산은 다 똑같이 생겼어. 나도 나이가 들어서 힘들고, 이제 푹 눌러 앉아 시타르나 배우고, 힌디어나 공부할려고요."



"1년 반정도 여기에 머물건데, 계산해보니까 한 달 생활비로 11만원이면 되겠더라고요. 만세! 어쨌든 방 알아보러 다니고 이것저것 정보좀 얻으려고 여기 장기로 있는 친구한테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하나도 몰라! 니미. 6개월동안 있었다는데 자기 말로는 가난한 여행자래. 그런데 맨날 술 마시고 지미럴. 방 값도 모르더라고요. 계속 게스트하우스에 있었대. 그러고는 가난한 여행자. 물어보니까 아무것도 안 배운대요. 그냥 멍청하게 6개월 보낸거야. 여기서 아무것도 안 배우면 폐인되요."



"모로코에 앉아서 있으면 다 되요? 다 똑같은거야. 목적없이 다닐 바에야 차라리 딸딸이나 치는게 낫지"





그 방에는 남자와 나 이외에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트래킹을 함께 했던 강연이었다.


남자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목적'을 강요하며 '목적 없는 여행은 무가치한 여행' 즉, 방랑일 뿐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해줬다.


강연이에게는 목적없이 여행다닐 바에야 이 곳에 푹 눌러 앉아 요가 라이센스라도 따는게 어떻겠냐고 말한다.


그러곤 나를 힐끔거리며 자꾸 비교하기 시작한다.


"저 분은 사진을 찍으시니까."



이제 슬슬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비교당하는건 질색이다.


게다가 내 여행의 목적은 사진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여행에 가치란걸 매길 수 있는걸까? 의심되기 시작했다.





사전적 정의로서의 여행이 아닌, 자아와 직접적으로 연계된 그런 여행 말이다.


내게 물어봤다.


그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닐까?


이데올로기나 체제, 혹은 사회따위와의 관련성을 배제한 순수한 여행에서 합목적성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테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모든 관련성을 배제한 순수한 여행은 이미 예전에 끝장나버린 게 아닐까?


흔히 삶이 여행이라고 하지만, 그 여행과 지금 내가 말하는 여행은 엄연히 다른 류의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이 단순히 가스통을 머리에 이고 끙끙거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것인지, 가스통을 목적지에 내려놓는 순간 혹은(내려놓을 수 없다면) 이고 가는 내내 펼쳐지는 시간과 장소의 향연인지는 더 생각해볼 문제다.





남자는 그런 말도 했었다.


"요즘 세상에 여행지가 어딨어요, 죄다 관광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