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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잡문(旅行雜文)

서른살에 쓰는 장래 희망

by 빛의 예술가 2014. 3. 15.

과학자였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선생들이 한 장씩 던져주는 장래 희망을 기입하는 종이에 갈겨 쓴 직업 말이다.


어느 순간 다니던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란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지만, 내 장래 희망은 바뀌지 않았었다.


그 처럼 고정된 채 존재하던 내 장래 희망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며 사라진다.


팬텀기가 네이팜탄을 쏟아낸 후 굉음과 함께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 처럼, 내게 있어 꿈을 적어야하는 란은 폭격이라도 맞은 양 공란이 되기 일쑤였다.


그처럼 짖이겨진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다급하게 찾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B-52를 곤죽이 될 때 까지 마셔본다 한들 커피와 오렌지 본연의 향을 맛볼 수 없는 것처럼,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교육 과정을 마치고 월급을 주는 조직에 입사했다.


그 진부한 사이클을 진행시키는 동안, 남들이 모두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난 철저하게 감정을 숨겨야 했고, 그렇게 희미해져갔다.


딱 한 번 쯤은 조심스레 숨겨둔 감정을 폭발시킨 적이 있었다.


"에이 씨발!!"


난 그렇게 소리치곤 엉엉 울었다.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내가 만취한 상태에서 쏟아내는 욕지거리였다는 사실이었고, 제대로 된 점이 있었다면 우리 부서 모든 사람들이 내 감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


당시 난 입사한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막내였다.


그렇게 난장을 부린 다음날, 출근을 해서 멍청히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한 선배는 음료수를 사와 내게 던져줬고, 어떤 과장님은 속 쓰리지 않냐며 해장 라면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내 기우와는 달리 어느 누구도 내가 만취상태에서 지껄여댄 욕설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나의 소요를 목격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


내겐 그게 더 비참한 우리네의 현실이었다.






현 사회에서 본인의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진짜 감정을 표출할 수 없는 삶을 살았으며, 학창 시절 때 진짜 감정을 표출했다가는 선배나 선생들에게 얻어맞기 일쑤였고, 병역 의무를 행할 때 진짜 감정을 표출한다면 영창, 재수가 없으면 육군 교도소로 향할 뿐이었다.


그 지랄같은 과정을 거쳐 입성한 사회라고 별반 다를 것은 없다.


돈 줄을 쥐고 있는 그들 혹은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진짜 감정을 드러내는 행위는 경제적 자살행위에 불과하니 말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다.


대체 어떤 작자들이 그렇게 알려준 건지 일일이 추적할 순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고 믿고 있다.


그 믿음을 증폭시키는 힘은 다수 기성 세대들의 동조였으며, 증명의 주체 역시 그들이었다.


일례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자칭하는 그 대학교의 어떤 교수가 써내려간 푸념섞인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현상 말이다.


많은 젊은 친구들이 그 책을 보고 지금 아픈 것을 당연시 여기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우리들은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만든 채 상황에 맞추어 그 가면을 바꿔치기하며 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말했다.


"세상 좆같네"






자본주의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개념 중의 하나는 '생산 관계'를 규정하는 일이다.


자본가와 그들을 위해 일하는 계층이 확연하게 구분된 것이 자본주의인데, 이 것이 고대 노예 제도나 중세 봉건 제도와 확연하게 차이나는 것은 마치 그 것이 공정하게 보이게끔 포장되어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노예 제도상의 왕과 노예, 봉건 제도상의 영주와 농노를 언급할 때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쉽지만,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를 언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반대 끝에 있는 사상의 존재(혹은 몰락)는 둘째 치더라도,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자본가에게 '판매'할 수 있다는 시스템은 하등 문제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누구나 어린 시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테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들 중에 태반은 '상품과 화폐'를 읽다 책을 집어 던졌을 테고 나머지는 꾸벅꾸벅 졸다 읽다 포기를 반복했을 테다.


결국 자본주의의 공정을 논하기에 앞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그 체제 혹은 사상에 대해 깊이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심각한 잘못이었다.


그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판에 어떤 룰이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카지노로 따지면 21을 만들어야 한다는 블랙 잭의 룰도 모르는 채, 어떤 패가 나왔을 때 스플릿을 해야할 지도 모르는 채 게임을 하고 있는 요량이고,


야구로 따지면 빈볼에 맞았을 때 어디까지 출루해야하는지, 홈런을 쳤을 때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결국 우리는 룰(Rule)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끝도 없이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한다.


허나, 운이 좋아 자본가의 눈에 들어 노동력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해도 그리 크게 변하는 사실은 없다. 


매달 15일마다 꼬박 꼬박 돈이 들어온다는 행(혹은 불행)은 생각하기에 따라 족쇄가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관계를 규정짓기 위해 자문하고 자답하는 순간, 극소수를 제외한 당신은 체제에 굴복하게 된다.


꼬박 꼬박 통장에 꽂히는 월급 몇 백만원(많아 봐야 몇 억원)이 당신의 가치가 되고, 존재 이유가 되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생의 의지에 비릿한 소주를 마시며 비릿한 웃음을 지어댈 지 모른다.


그리고 만취한 상태에서야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씨발.. 퉷.. 에이 씨발.. 내가.. 왕년에 말이야!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


이상할 건 없다.


인생이 그 지경에 이르렀으면 얘기하며 웃을 수 있는건 '과거'뿐이니 말이다.






사실 난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에 상응하는 능력도 없는 지천에 널린 '그냥 사람'이었다. (지금이라고 대단한건 아니다. 당연히 지금도 '그냥 사람'이다)


나 역시 자본론을 읽으며 끝도 없이 졸아댔고, 흘린 침으로 책은 흥건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렇게 간헐적으로 자본론을 끝까지 독파한 순간 생각했었다.


"씨발.. 아무 것도 모르겠네"


그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난 10년이 넘도록 자본론을 읽기 위해 갖은 지랄을 했었다.


머리가 멍청한 탓도 있을 테고, 멍청함에 덧대 게으른 탓도 있었겠으나 내가 인생을 걸고 참여하는 이 게임의 룰은 알아내기로 작정 했었다.


그렇게 반복을 거듭하자 희미하게 감춰졌던 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것이 사막의 오아시스인지, 신기루인지 판단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모래투성이가 아닌 또 다른 오브제가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느 덧 서른이 되었다.


한국 나이로 서른이요, 인터네이쇼날 에이지로 항상 스물 여덟이라 주장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진짜로 서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십 수년 째 공란이던 장래 희망을 적을 수 있겠다 싶었다.


록 스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해적 왕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여행을 끝내고 귀환했을 때 다시 사각형의 책상에 앉아 자본가가 던져주는 몇 푼의 돈에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개처럼 일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 꿈은 록스타이자 해적 왕일테다.


그런 삶을 살겠다고, 


이제서야 공란이던 나의 장래 희망을 채워넣는다.






끝.









p.s.


글 좀 읽었다고 비웃는 당신, 메타포가 어쩌니 떠들어대지 말길 바란다.


난 멍청해서 메타포가 뭔지 잘- 모른다.


내 장래희망은 진짜 록스타이고, 진짜 해적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