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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잡문(旅行雜文)

Raanjhanaa

by 빛의 예술가 2014. 8. 18.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난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꽤나 많은 영화를 봤었는데, 그 것을 수치로 환산해보라 한다면 당신들이 지금 상상하고 있는 것 보다 많은 편 수의 영화일 것이다.


어쩌면 난 당신이 들어보지도 못한 제목의 영화들을 스물 다섯가지 정도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들이 스물 다섯 가지 제목의 영화를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 것들을 모두 접해본 것은 아닐테다.


조금은 괴팍하고, 아주 조금은 편협한 내 취향 탓에 대중적인 영화를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후 계속해서 하게 될 음악 이야기처럼, 내게 영화란 대부분이 '과거'였다.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보다 위대했으며,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이유?


포마드로 머리를 깨끗이 빗어 넘기고, 굵은 테의 안경(혹은 얇팍하고 렌즈가 동그란)을 만지작 거리며 레제 시나리오니 미쟝센이니 떠들어댈 재간은 없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다는 것이다.


당신도 그럴테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유'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난 지 두 달 정도가 지났다.


이 곳은 인도. 다즐링이다.



티벳 전통식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내 생애 두 달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를 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력 탓에 답은 쉬이 도출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생각이란걸 해본다.


그렇게 결론이 도출된다.


'아마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었나? 시팔 모르겠다.'





그렇게 숙소에 돌아온 나는 빈둥 거리며 어느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낭만적인 일상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침대에서 낮잠을 청한 후 빈둥대며 생각할 것이다.


'저녁은 뭘 먹을까?'


완벽했다.





점심은 조금 멀리서 먹기로 결정했다.


결국 다즐링 기차역까지 걸어가 맛있어 보이는 식당을 찾으려 두리번 거리는데 무언가 큼지막한 건물이 보였다.


이 작은 도시에 도착한지 4일 째 되는 날이었지만 처음 보는 건물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백화점인지 쇼핑몰인지 여하튼 그게 그건지, 어쨌든 중요한건 영화관이 입점한 건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인도의 전형적인 미남 미녀가 이마를 맞대고 당장에라도 사랑의 말을 속삭일 것 같은 대중 영화의 포스터였다.


내 취향은 아니겠지만, 인도에 왔으니 대중적인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재수가 없어 영화를 잘못 선택하면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춤과 노래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작품'을 만날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발리우드는 등장 인물들의 춤과 노래(대부분 합창과 군무)로 유명하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힌디어로 영화를 봐야한다면 등장인물이 춤이라도 추고, 노래라도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반대편을 바라보자 두 번째 후보가 나타났다.




처음 만난 후보는 이름이라도 읽을 수 있었지만, 이건 읽기도 힘든 제목의 Raanjhanaa다.

(당신들도 읽어보도록 하자. Raanjhanaa다.)


나를 일순 문맹자로 만들어버린 이 영화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많은 남자들이 콧방귀도 끼지 않는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듯이, 쉽게 읽히지도 않는 제목의 영화이기에 봐야겠다고 결심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던 젊은 사람을 불러세워 '저 영화를 보고 싶은데 영어 자막이 나오는가?'라는 멍청한 질문을 해본다.


인도인은 코웃음을 치며 능숙한 영어로 대답한다.


"힌디어와 타밀어 둘 중에 선택할 수 있다. 행운을 빈다."






그래서 난 힌디어 버전을 선택했다.


적어도 "꺼져", "저리 가", "사랑해", "얼마예요?", "깎아주세요" 정도의 힌디어는 알아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가 상영하는 내내 내가 알아들은 힌디어라곤 "꺼져"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영어로 말하는 부분은 제외하고)







영화는 끝났다.


이 곳에서 영화가 어땠느니 왈부왈가 하진 않을 생각이다.


난 줄거리도 말하지 않을 테고, 엔딩도 말하지 않을테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난 포마드를 바르고, 뿔테 안경을 낀 영화 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묻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이 검색어로 유입한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이야기지만, 난 이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을테고 영화를 모티브로 무언가를 떠들어대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종종 써갈겨대는 잡문 중에서도 아주 저급한 수준의 잡문인 것이다.




단지, 그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영화가 끝난 것처럼 나의 여행 역시 끝났다.


난 한국에 돌아왔고, 이제 다시 여행기를 쓸 생각이다.


다시 시작하는데 멋진 출발이라 생각한다.


아주 저급하고 의미조차 없는 글을 토해내며 다시 시작할 것을 약속하는 행위 말이다.









Raanjhan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