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 기차를 타고 세상의 끝까지 갔다.
그 곳에 도착해서 동서남북 방향을 잡지 못하고 빙빙 돌고 있으려니 비참한 기분이 든다.
배도 조금 고팠으며, 잠이 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치 내 두 발은 내가 원하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는 양 의기양양하게 행진하기 시작한다.
'나'는 내 발에 이끌려 그 곳으로 간다.
터벅 터벅..
광활한 바다였다. 이미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이 곳이 바다라는 사실은 알 수 가 있는 것이다.
색깔이야 어떻든, 백사가 있고 파도소리가 들리니까, 이 곳은 바다인 것이다.
허여멀건 백사에 쭈그리고 앉아 마지막 남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저 곳에 뛰어들면 스텔라 바다소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어쩔 수 없나보다. 생의 끄트머리에서도 공상으로 시간을 죽인다.
.어느 덧 시간이 되었다. 꺼져가는 담배를 백사에 비벼끄고, 꽁초를 연필삼아 허여멀건 백사에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광활한 종이에 비해 연필이 보잘것 없이 작았기 때문에 글씨를 크게 썼다.
큼지막하게..
쓰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광활한 백사에 유서를 끝까지 적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 시커먼 바다에서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벅 저벅.
여자였다.
아주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생긴 기분좋은 인상의 여자.
"뭐해요?"
"유서를 쓰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네."
"이런 곳에 쓰면 곧 지워질텐데요."
"상관 없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유서가 아니니까요."
"흐음.."
짧막한 대화였지만 순간 극심한 허기가 찾아든다.
감수하고 부탁한다.
배가 고프니 저녁을 사달라고.
그녀는 흔쾌이 허락을 하고 나는 그녀의 뒤를 총총 따라간다.
김치찌개에 백반. 그녀는 생각이 없으니 술을 마시겠다고 한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멍청히 앉아있노라니 그녀가 잔을 건넨다.
"술 잘 마셔요?"
"보통 고등학생들이 마시는 만큼 마십니다."
"흐응"
이상한 콧소리를 내며 그녀는 웃어보인다.
밝은 곳에서 얼굴을 쳐다보니 아까보다 조금 더 우스꽝스러운 얼굴이다.
어딘가 조화가 되지 않는.. 그런 얼굴.
그렇게 몇 병정도인가 마시고 나서 그녀가 말을 꺼낸다.
"나 사실,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여기 왔어요. 근데 난 정말 자살하러 온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살아야 할 당위성 따위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만.
슬픔을 끌어안은 두 남녀가 서로 부둥켜 안는 것으로는 그 슬픔의 색체가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알고 있을 나이였다.
제발 그만.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잘 먹었노라 말하고 도망가듯 뛰쳐나온다.
희멀건 백사에, 시커먼 바다.
나는 이미 자살했다.
모든 것을 세상의 끝에 던져버리고, 흔적을 백사에 남겨놓고, 죽어버린 것이다.
허나 그 것을 알 턱이 없는 저 여자는 나를 붙잡고 훈화를 하는 것이다.
난 그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끝이다.'
나는 의기양양히 미소짓고 첫 번째 자살을 자축하며 뒤돌아선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임박한 것이다.
두 발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한다.
"난 여전히 네가 가고 싶어하는 곳을 알고 있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곳으로 널 데려다 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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