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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226

(20130424)내 이야기 스펙을 높이려 안간힘을 쓰는 자들을 비웃었다. 'spec? 사람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한 사람을 스펙 따위로 판가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사색하고 행위하며 타인을 설득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블로그에는 온갖 수상 경력과 사회 생활 이력, 자격증 리스트 따위가 자랑처럼 나열된 내 소개 글이 갱신되고 있었다. 오래 된 일이 아니다. 몇 해 전 내 이야기다. 지금은 닫아버려 남들은 볼 수 없는 치졸한 과거이지만, 나는 언제나 그 글을 볼 수 있다. 지우지 않은 이유는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이유는 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 만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대학생들과 달리 빚에 시달리지도 않았으며,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학교 생활을 다녀야 할 정도로 가난.. 2013. 4. 24.
(20120919)사직서와 라이트블루 사직서를 썼다. 제출하진 않았다. 멀지 않은 미래, 난 이 종이를 제출할 예정이며 그보다 멀지 않은 미래, 이 회사는 나를 놓아줄 것이다. 빠르면 올 겨울 난 백수가 된다. 이유를 쓰라고 한다면 세계일주다. 반드시 세계일주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난 이유를 그 것으로 꼽는다. 이종의 메타포인 셈이다. 내가 세계일주를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유는 세계일주여야 한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운전 기사가 있고, 강이 보이는 12층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나를 과장이라고 부르며 지시를 기다리는 직원도 있다. 세후 연봉이 5천 만원에 육박하고 있으며 숙식에 교통, 통신비가 지원되어 돈이 나갈 일도 별로 없다. 주재원들은 모두 내게 친절하며, 현지인들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 아버지 뻘의 임원들과도.. 2013. 4. 16.
(20120627)지속가능한 노름질 모처럼 연휴다. 이틀간 이 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한국보다 이 곳이 좋은 점 중 하나는, 한국에선 쉽게 갈 수 없는 곳에도 슬리퍼를 끌며 쉬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홍콩이나 마카오. 홍콩이나 마카오. 홍콩이나 마카오.. 홍콩이나 마카오... 마카오로 결정했다. 결정은 빠를 수록 좋고, 생각은 없을 수록 좋다. 내 머리의 깊은 곳에서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도시, 마카오였다.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세계 각국에서 노름질과 분탕질을 행하러 온 사람들이 뿌려대는 돈으로 움직이는 도시. 그들이 슬롯 머신의 레버를 한번 더 당길 때마다 소비는 가속화되고, 그 만큼 꿈과 희망은 부풀어 오른다. 꿈과 희망의 팽창은 신자유자본주의의 밀도를 견고하게 만든다. 그들이 카드.. 2013. 4. 16.
(20120531)고문 짙푸른 철창 안이다. 투영되는 푸르름은 5월의 녹음과는 달리 그 밀도를 견고히 하였다. 어쩌면 녹이 슬었을 지도 모른다. 어두운 이 장소에서 철창의 녹을 생각했던 이유는 강철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네 발자국 정도 걸어야 닿을 수 있을 거리에 펼쳐진 철장이다. 거리가 멀다. 이렇게 심한 냄새가 날 리 없었다. 분명 녹이 슬었으리라 확신했다. 난 어딘가에 묶여있었는데, 철장을 인식했던 내 안구조차 무엇이 나를 옭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팔이 허공을 향해 있었으며, 두 다리는 비정상적으로 벌어져 있었다. 묶여있다.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실 뿐이었다. 불안해진 나는 목을 이리 저리 돌려보았는데, 목을 죄고있는 '어떠한 끈'이 귓볼을 간지렸다. 씨팔.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대체 어떤 것.. 2013. 4. 16.
(20120429)넌 아직 쥐가 아니네? 오늘 지갑을 펼치자 1원짜리 지폐만 가득했다. 나는 월급을 달러로 받기 때문에 환전이란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거쳐야 이 곳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 물론 하루라도 음주를 빠트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행할 도리가 아니기에, 급히 환전을 부탁했다. 사무실에는 주재원의 월급을 담당하는 금융설계사 비슷한 직원이 하나 있다. 하지만, 재테크를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시키면 돈을 인출하는 것 그리고 환전하는 것. 조금 고차원적인 업무라면, 환전을 한 돈을 인출하는 것. 매우 고차원적인 업무라면, 주재원이 주말 식사를 하고 영수증을 주면 ERP에 등록하는 것이다. 1원 짜리 지폐밖에 꽂혀있지 않은 내 지갑에 미안해졌기 때문에 천 불을 환전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천 불이라면 하루 술 값밖에 되지 않겠지만, 이 곳에서는 석 .. 2013. 4. 16.
(20120407)Theme of ema 이 곳에서는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이 부분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던지, 저 부부분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던지 어쨋든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은 전무했다. 100개의 계획을 세우면 100개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그 거대한 일그러짐에 적응해간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계획의 틀 안에 갇혀 존재한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의 출산 계획 안에 당신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 계획의 성공적인 달성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당신이 태어났고, 살아간다. 어떤 식으로 계획이 수정되더라도 현 상태를 좌우지할 수는 없다. 그에 대한 증명을 시작하려 한다. 이조 가능성의 질에 입각하여 계획에 변경을 가져오는 요소들은 그 유형을 달리하지 않는다. 결국 상대적인 힘의 크기에 따라 요소의 서열이 정해지고 계획이 뒤틀어지.. 2013.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