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대.
우리 아버지는 그런 시대를 살아오셨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모바일 신문을 읽던 중 화염병으로 시위를 하던 20대 남자가 불구속입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경찰서에 구금되어본 적이 있을까?'
오늘은 친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이 친구와 언제부터 친해졌는지.. 그런 류의 질문을 받으면 난 조금도 서슴치 않고 대답할 수 있다.
2002년 6월 21일 오후 2시부터라고.
친하다면 그런것 쯤은 기억이 나는 법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건 거짓말이다. 자기 방어를 위한 바리케이트에 불과하다.
녀석을 만나기 위해 오랫만에 화장을 한다.
컴퍼넌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smokie의 음악이었기 때문에 눈화장을 짙게 한다.
입술은 칠하지 않는다.
귀걸이는 하지 않고, 심플한 목걸이를 목에 건채 거울을 바라본다.
나도 이제 서른이구나.
몇 해전인가 즐겨타던 스쿠터를 팔아버리고 중고차를 한대 샀다.
기종은 랭글러 레니게이드.
아버지는 자기가 타고 다녀도 될 정도라고 하시며 농담하셨고, 어머니는 차에서 내리는 내 모습을 보고 실소하셨다.
나란 여자와는 잘 어울리는 자동차.
랭글러 레니게이드.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시동을 걸고 습관적으로 와이퍼로 유리창을 두번 닦는다.
버지니아슬림을 꺼내 물고 듀퐁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출발.
친구녀석은 예상대로 먼저 와 있었다.
"잘 지냈어?"
"잘 지냈지"
"남자친구는?"
"잘 지내"
"부모님도 잘 계시지?"
"응"
단답을 요하는 질문과 짧게 답변하는 나.
아마도 우린 이런류의 대화로 시간을 죽이겠지.
준벅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던 중 녀석이 갑자기 묻는다.
"나 남자친구랑 헤어질려구"
생각을 요하는 문제다.
몇 해전부터 결혼을 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녀석이었는데, 무슨일이 있었을까?
"마음에 들지 않아,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해."
재미있는 녀석이다. 아직도 사랑이란 것의 유효기간을 운운할 정도로..
나이 30을 먹고 사랑의 유효기간을 논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대신 이렇게 대답한다.
"네 남자친구도 너랑 헤어지고 싶을걸?"
예상했던 대로 친구녀석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계속해서 지껄이기로 한다.
"세상 만물에는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지. 입구만 있고, 출구만 존재하는, 그런 엿같은 경우는 존재하지 않아. 사실 사랑도 마찬가지야. 모든것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사랑이지만, 사랑도 세상만물에 속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지. 유효기간은 아무도 몰라. 하지만 분명히 끝난다는거. 그리고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말이 있지. 키만 크고 멀대같은 네 남자친구보다 더 멋진 남자는 이 세상에 많아. 하지만 넌 그 남자를 선택했고 사랑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난 지금 내 남자를 선택했지만, 다른 멋진 남자를 흘끗거리지. 하지만 언제나 대답은 마찬가지야.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 이건 정론이지. 원래 남의 떡은 더 커보일 수 밖에 없고 내 떡은 맛없어 보일 수밖에 없는거지."
갑자기 녀석이 고개를 든다.
그리곤 울기 시작한다.
이제서야 난 알아챈다.
우리의 시대는 끝장나버렸다.
아버지가 살아왔던 멋진 시대도 끝이나고, 더불어 화염병과 최루탄도 끝이났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학교를 봉쇄하던 학생들은 지금쯤 회사 속의 바리케이트안에서 컴퓨터와 함께 골머리를 앓고 있겠지.
하지만 궁금하다.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는 배불뚝이 아저씨들은 정말로 그 시절이 그립지 않은걸까?
타이핑을 하던 손으로 다시한번 뛰쳐나와, 화염병을 집어들 수는 없는걸까?
답변은 쉽게 도출된다.
그럴 수 없다.
절대로.
그때서야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진다.
웃으며 울었다.
우리는 밤새, 울며 웃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폈다.
그렇게 만취한 채로 랭글러 레니게이드를 운전한다.
이 상태로 운전하다, 어느 집 대문이라도 부숴버릴 수 있다면, 우리의 시대가 끝장나버린 사실을 축복할 수 있겠지.
시속 180km/h의 속도로 질주.
B.G.M은 모짜르트의 교향곡 1번 1악장 .
Good bye my generation.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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