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로맨틱한 사건으로 사랑을 기억한다.
조금씩 변형되어 세상에 회자된 이 말은 뭇 흡연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물론 말보로와는 하등 관계 없는 문장이며 로맨틱한 마케터의 낭만적 상술이었다는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알게 되었다.
난 말보로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
물론 처음에 물었던 담배가 말보로 미디엄이긴 하나, 나의 기억 속 완벽했던 담배는 필립모리스 라이트였다.
새파랗게 피어오르는 연기하며, 폐암 유발 확률 1위의 담배라는 위대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던 담배.
하지만 이미 단종되어 어느 곳에서도 녀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뜨거운 남국의 섬에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필립 모리스를 찾아 헤맨 것이다.
정말 기적적으로 필립 모리스를 찾을 순 있었지만 라이트가 아닌 멘솔이었다.
대성통곡을 하던 내게 점원이 이렇게 말했다.
"what happen? both ain't different."
필립모리스는 시간과 국적을 넘어서 끝장난 담배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보로 이야기를 하자.
학창시절, 내가 좋아하던 형이 만취한 채 여자친구의 눈을 피해 내게 사달라고 말했던 담배가 말보로 라이트다.
침대에서 일어나 귀찮은 듯 불을 붙이던 그녀가 피던 담배는 말보로 레드였다.
다른 그녀는 담배를 피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자꾸 담배피면 나도 담배 피울거야.'
비겁했다.
버지니아 슬림도 아닌, 말보로를 손에 들고 담배를 피겠다고 협박하는 모양새가 귀엽기도 했었지만.
이처럼 말보로는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담배다.
이미 끝나버린 로맨스 혹은 수 천 마일 바깥에 존재하는 그 남자와 관련 있는 것이다.
나와 유일한 공통집합을 따지자면
남자는 로맨틱한 사건으로 사랑을 기억한다는 그 문장이다.
지금, 서울에는 첫 눈이 내린다.
추적추적하게 우박과 함께 쏟아지는 진눈깨비가 아닌, 순백색의 빛과 함께 흩날리는 첫 눈 말이다.
가을이 녹아내리고, 겨울이 그려진다.
마치 생명을 잉태한 듯 위대한 아름다움에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본다.
그러던 중 예언처럼 흘러간 로맨스가 떠올랐다.
바바뱅가의 미친 예언과는 달리, 한 치의 오차도 없으며 피해갈 수 없는 '예언' 말이다.
'당신은 첫 눈을 보면 흘러간 로맨스를 기억하게 됩니다'
마치 내 두뇌는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것 마냥 로맨스를 기억한다.
성문화된 법칙처럼, 하나 둘씩 천천히 기억을 곱씹는다.
그땐 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그리고 그땐 왜 그렇게 어렸을까?
만약 그때 이렇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심한 말이 아니었을까?
내가 너무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내가 받은 상처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없는건 아닐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면 실수하지 않을까?
수 천억명의 과거인들이 모두 한 번씩은 고민했던 그런 진부한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첫 눈이 내리는 날 흘러간 로맨스를 기억하는 것 따위 말이다.
단지, 내게 과분한 사랑을 줬던 흘러간 로맨스의 여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비겁할 정도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당신도 행복했으면 한다.
아름다운 첫 눈을 보며 옆에 있는 남자의 손을 꼭 쥐었으면 한다.
옆에 남자가 없다면, 다가올 사랑을 기약한 채 달콤한 꿈을 꾸었으면 한다.
꿈을 꾸며 눈물이 난다면 이렇게 생각했으면 한다.
"what happen? Both ain't diffe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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