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그 여자를 만난 이래로 지금까지 일기를 써왔다고 한다.
그런 지리멸렬한 이야기는 듣지 않는게 상책이지만, 그 때는 들어야만 했다.
사람이 숨을 쉬며 살아가다보면, 주먹만한 소행성이 이웃집에 수직 낙하하는 마음 아픈 일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슨 사랑노트 같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유치한 컨셉트였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적었노라고 음성을 높였다.
그 순간 효율적인 내 두뇌에선 '정말 대단하다' '애틋하다' '진정 사랑했구나'따위의 감상적 이미지가 떠오른 게 아닌,
'과연 당신이 하루도 빠짐없이 그 일기를 적었나요?' 라는 괘씸한 생각이었다.
풀이 죽은 채 계속 이야기 했다.
나 역시 풀이 죽은 채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소주를 마신 후 더더욱 죄가 없는 소줏잔을 탁자에 내리쳤다.
'지루해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참기로 한다.
난 이웃집에 주먹만한 소행성이 수직낙하했을 때, 우리 집의 지붕은 멀쩡한지 두리번 거릴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니콘의 D시리즈로 찍은 사진까지 예쁘게 꾸며 사진일기처럼 꾸몄다고 했다.
어쨌든 잘 다루지도 못하는 멀티미디어를 배울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었다.
그 밖에
동영상은 없었지만, 사진과 온갖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고,
그녀와 처음 만난지 700일이 되는 그 시점에, 약 700페이지가 문서로 고스란히 꾸며져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수 천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한번 쯤 그러했듯이
이별했다고 한다.
그렇게 수 천억명이 한번 쯤은 겪었을
이별의 아픔을 감내한다.
물론 수 천억명의 사람들 중 수 천억명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살아간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그 것이 힘든 모양이다.
그 순간 나는 이웃집에 주먹만한 소행성이 수직낙하하는게 더 마음 아플지, 소말리아 해적이 RPG로켓포를 쏴대는게 더 마음 아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하튼 남자는 그 것이 힘든 모양이고, 난 남자의 말을 듣기가 힘든 모양이다.
그래서 남자는 그 사랑노트인지 뭔지를 지웠다고 한다.
그녀와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그 노트를 삭제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빨랐다.
남자는 인텔社에서 개발한 CORE I5정도의 CPU가 탑재된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에 준하는 사양을 가진)
순간,
남자는 그 것이 충격이었다고 말한다.
수 백일이 넘는 시간 구구절절이 적어온 그 사랑이 지워지는 일각의 시간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루해진 나는 파우치에서 립스틱을 꺼내 바르며 남자와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 남자가 그런 짓을 한다면?'
'그리고 이별 후 이런 짓을 한다면?'
생각만 해도 개떡같은 순간이었다.
당신과 내 사랑을 멸하는 시간, 일각.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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