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고 하기에는 이 가을이 애처로웠다.
엊그제 창 밖에서 바라봤던 하늘로 흩날리는 낙엽이 애잔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인왕산과 안산의 사이에 위치한 이 곳은 골짜기라는 지리적 특수성을 띄고 무상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지난 주에는 수영 학원에 좀처럼 나가질 못했다.
평일 주말을 막론하고 약속이 잡혔기 때문이다.
온통 비생산적 술자리 뿐이었다.
그 사람들은 회색분자인 나보다도 정치에 무관심하였으며, 금융 회의론자인 나보다 재테크에 대해서 무지하였고, 체제 전복의 기회를 호시탐탐노리는 나보다 신 자유주의에 대한 고뇌가 부족하였다.
냄새나는 영감같은 얘기따위 짖이겨 버리더라도,
그 사람들은 베토벤과 바흐를 구분하지 못하였으며, 그 짧막한 맑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은 경우가 없었고, 대량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대중 영화를 제한다면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래셔널하지 못한 나의 인문/예술적 취향을 한 발 양보한다 손 치더라도,
그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나와 이상을 달리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그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멍청해보이는 저 녀석은 뭐지?"
쇼펜하우어가 지적한 바와 같이 명랑하지 못한 내 모습이 에고를 구성하고 있음은 인정한다.
결국 그러한 모습이 구태의연한 현실과 슈퍼에고의 벽에 부딪혀 이드정도는 다른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으나,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타자와 피아 구분 짓기를 행하는 인간 군상에 속해 있다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나는 아니라고 도리질 쳐봤자 과거인들이 분석해둔 방대한 매트릭스를 펼쳐놓으면 어느 부분인가에 내가 포함되었다.
나는 전연 특별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와 매일 아침 인사를 하고,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가끔 술을 마시는 그 남자들은 꽤나 나이가 많다.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남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문경씨는 초등학생이었어요"
그 남자들과 어제 술을 마셨다.
보쌈과 해장국이 맛있어 소주를 홀짝홀짝 하고 있노라니 이내 취해버린다.
'아직 술이 부족하다'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어떤 남자가 2차를 가자고 말한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따라간 곳은 스크린 골프장이었다.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스크린 골프장 말이다.
그 남자들과 차이가 나는 건 나이 뿐만이 아니었다.
취미도 달랐고, 사상도 달랐고, 옹호하는 체제도 달랐으며 좋아하는 음악도 달랐고, 예술적 취향도 달랐으며 심지어는 좋아하는 스포츠까지 달랐던 것이다.
한 번도 쳐본 적이 없다고 쭈뼛쭈뼛 대고있자 그들은 내게 골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거의 정확하게 1년 전,
내가 이 곳에서 술에 취한 채 넥타이 매는 법을 배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지껄여놓은 글이 있었다.
그리고,
난 술에 취한 채 7번 아이언을 잡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스윙을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대로 체제에 순응해버린다면 내 인생은 끝이다.
난 이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태어난 남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토록 더러운 체제 속에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그게 내 신념이고, 행위의 근간이 되는 담론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 무얼 하고 있지?
혼란스러웠다.
7
나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지경에 와버렸다.
드디어 이 정신나간 체제가 나를 속박하는데 성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의려하자,
어제 18홀까지 미친듯이 채를 잡고 휘둘렀던 내 손이 얼얼해졌다.
아팠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가을이 끝나기 전에 당신의 품에 안겨 위로 받고싶다
생각했다.
왜 나는 소모되고 있는걸까?
아직 잔치가 끝나지도 않은 이십대인데.
이상처럼 두 팔을 벌려 훨훨 날아보지도 못하였는데.
결국, 사기꾼 앤디 워홀처럼 말할 수 밖에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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