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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120208) 회복하는 상처

by 빛의 예술가 2012. 9. 26.

신발장을 열어보니 운동화가 한 켤레 뿐이었다.
여기서도 운동화를 잘 신지는 않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왜 나는 운동화가 한 켤레밖에 없는걸까?'

오만가지 이유가 떠올랐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이 곳에 올 때 운동화를 한 켤레밖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



운동화를 사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부터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신푹신한 손가락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기사에게 전화를 한다.

'나 홍콩에 갈거야'

운동화를 보러 침사추이에 갈 필요는 없었지만,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침사추이역에서 내린다.

캘빈 클라인 진에서 마음에 드는 재킷을 발견했지만 입어보니 소매가 조금 길었다.
그 곳에서는 전 상품을 20%할인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는데 재킷은 7,760불이었다.

가격은 매우 저렴했지만, 그 이유로 구입을 했다가는 후회할 것 같았기에 이내 발걸음을 돌린다.



새로 발견한 몇몇 가게를 둘러보다 내가 홍콩에 온 이유를 기억해냈다.
'운동화'


웹에서만 봤던 몽콕으로 이동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천국이었는데, 난 가난해서 저런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어본 적이 없다.

신어본 적이 없기에 싫어한다.
물론 나이키와 아디다스 사장 및 임직원도 나같은 가난뱅이를 싫어할 것이다.

'저 인간은 인체공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우리 회사의 하이테크놀로지를 경험할 돈이 없군'


다행히 그 곳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반스나 스코노같은 운동화를 구비해놓은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찾기 위해 8번째 운동화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꿈에 그리던 운동화를 발견했다.
영국인 뺨 치는 유창한 영어로 내 사이즈를 말하려 했지만, 내 입에서 270이 영어로 나오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난 며칠 전만 해도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270을 영어로 말하지 못하다니.
마음이 아팠지만 중국어로 270이라고 말한다.

两百七十号, 我可以试试吗?

이 곳은 홍콩이니 뭐든지 가능하다.

어쩌면 내가 이백칠십이라고 말해도 점원은 270사이즈의 운동화를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물론 니햐쿠나나쥬라고 말해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270사이즈 운동화




운동화를 신어보던 중 내 손에 생긴 상처를 발견했는데,

조금 어리둥절했다.

분명 이 상처는 10년도 전에 생긴 상처인데, 아직 그 흔적이 뚜렷했다.

'내가 잠들 때마다 상처의 요정이 내 침대로 들어와 내 손에 다시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명했다.


그런 요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분명 이 상처는 회복하는 중일 것이다.

회복하는 상처라니 티벳이 중국의 자치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역설이었다.
 
하지만 이 상처는 회복하고 있었다.

조금씩 그 빛을 더해 선홍색의 또렷한 흔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통증은 없다.

단지 운동화를 신으려 엄지손가락을 신발 안으로 집어넣는 순간 망막에 상처의 상이 더욱 또렷하게 
투영될 뿐이었다.

내 왼손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네 개가 있다.

모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얻은 상처다.


네 가지 모두 아물지 않는다.

조금씩 회복할 뿐이다.







post script.
1. 어쩌면 회복하는 상처는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임직원이 자사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 나에게 매일 밤 저주를 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 내가 쇼핑을 하는 시간 동안 기사는 6시간 동안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미안하지만 자본이 주가 되어가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처럼 특이한 나라에서는 이런 기다림이 곧 자본이며, 비노동의 산물이긴 하나 타자인 나에게는 상대적 잉여가치가 창출되었기에, 그 잉여가치를 분배하는 산물로서 네게 저녁을 사주겠다'

라는 말을 중국어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말 없이 40원짜리 저녁을 사주었다.


3. 영어로 270은 투 싸우전드 치빠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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