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일주 여행기/중동(Middle East)

(여행기/이란) 바킬 바자르 그리고 하페즈

by 빛의 예술가 2017. 7. 19.

[바킬 바자르 (Vakil Bazar)]


이제부터 나와 계속 여행을 할 사람들은 바자르(Bazar)란 단어를 많이 들을 지도 모르겠다.

이란 전역에서부터 근방의 아랍권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과거 페르시아에서 영향을 받은 이름이 '스탄'으로 끝나는 국가들(현재 7개국이 존재한다), 조금 먼 곳은 터키에서부터 북부아프리카까지.

그 어느 곳을 가든 바자르는 존재한다.


이 바자르는 좁은 통로가 특징 인데, 그 통로를 중심으로 양 옆에 작은 상점이나 공방이 알차게 들어서 있고, 그 통로의 위쪽은 돔 형태로 이루어져 통풍과 채광을 담당하는 형태로 지어졌다.


한국으로 따지면 우리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재래시장을 닮아있다.



여행을 하며, 난 세계 각지의 재래시장을 구경가기도 하고, 식자재나 소모품 따위를 구입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장을 보진 않았다.

조금만 걸어가도 편의점이 있고, 길을 꺾으면 수퍼마켓이 있고, 대로변에는 70%의 확률로 대형 마트가 존재하는 내 조국에서는 불편하게 재래시장을 찾아가야할 정도로 그 효용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초 거대자본이 만들어낸 선택의 기회의 박탈'따위의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바깥에 나와보면 그 것이 얼마나 기묘한 형태인지는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 그 거대자본은 '시장'이란 인류 역사와 길게 공존해온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를 차례차례 죽여가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꼬마 때는 동대문에 정말 시장이란게 있었다. 그것도 꽤나 큰 규모로 말이다.

신평화시장이나 동평화시장과 같은 특수 목적의 한 건물 안에 존재하는 시장이 아니라 그냥 그 주변에는 새벽마다 거리에서 물건을 떼고, 물건을 팔고, 그 것을 사러 온 사람들이 득실대며 생(生)의 기운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진짜 시장 말이다.

하지만 현재 동대문 시장이란 곳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과연 '시장'이라 불릴만한 곳인지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바킬 바자르 찾아가는 길.

이란은 당신들이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치안이 좋다. (물론 일부 개구장이들이 조롱과 위협을 행할 때도 가끔 있지만)

특히 작은 도시에 가게 되면, 그 안전도는 수도 테헤란에서 떨어진 거리와 정확히 비례하여 증가하는 느낌이다.


이란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아담하고 작은 도시인 시라즈는 그렇기 때문에 도보 여행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날씨가 몹시 더워 땀이 많이 흐른다는 단점이 있지만, 매우 건조한 기후인 이곳에서는 그늘에서 조금 쉬기만 해도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이런 미로와 같은 길을 걷다보면 멋진 벽화도 발견할 수 있는데, 아래의 벽화가 그 것이다.



바킬(Vakil)은 페르시어로 국회의원, 대표, 대리인 따위를 뜻한다고 하는데, 왜 시장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중요한 사실은 이 시장 역시 우리가 아까 다녀왔던 카림 칸 요새를 지을 당시 지어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장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카림 칸이 직접 이 바킬 바자르를 설계했다는 얘기도 한다)



바킬 바자르 옆에는 바킬 모스크도 함께 공존하는데, 이란 여행을 하면 우리나라 교회만큼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이 모스크다.

주 목적은 시장을 보러 온 것이기 때문에 모스크 옆으로 돌아 들어가도록 하자.

그럼 바킬 바자르가 시작된다.



초입에서부터 이렇게 서화나 공예품을 판매하기도 하고, 한눈에 봐도 '어 이건 골동품 수준인데'라는 느낌이 드는 물건들도 있다.

이 시장을 잘뒤져보면 정말 골동품이라도 하나 발견할 지도 모르니 방문하게 된다면 시간을 들여 시장을 구경해보도록 하자.

(물론 난 그런거 보는 눈이 없어 발견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건축물의 상징과도 같은 아치형의 지붕을 보며 걸어가면 계속해서 시장이 펼쳐지는데,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쉼없이 펼쳐진다.


[바킬 바자르는 이 정도 폭으로 세,네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그리고 이 곳 까지 걸어오면 순간 시원함을 느낄 것이다.

매우 건조한 기후라, 햇볕이 내리쬐는 야외는 말할 것도 없이 덥지만 그늘로 들어옴과 동시에 석빙고라도 들어온 듯한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석빙고는 뻥이다, 하지만 시원한건 사실)

어쩌면 이 나라에서 바자르(시장)을 이런 식으로 건축한 것도 식자재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직사광선이 내리꽂는 야외에서 판매하는 채소보다는, 최소한 이 곳의 채소가 훨씬 싱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킬 바자르와 주변에 있는 모스크를 구경하고 나니 반나절이 가볍게 지나갔다.

그때부터 약간 조급한 마음으로, 북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심지어 난 점심 식사를 하는 것도 깜빡 했는데, 도보 여행자에게 끼니를 거르는 행위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아마 난 그 정도로 하페즈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아이스크림을 두 개 먹어서 그런거 아니다.)




[사랑과 자유의 시인, 하페즈]


이란에서 이 시라즈(Shiraz)가 유명한 이유는 페르세폴리스나 카림 칸 요새, 바킬 바자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시인 하페즈다.


어릴 적 윤동주나, 한용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읽으며 밤을 지새워 눈물을 흘리곤 했던 문학 소년인 내가 

서정시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하페즈의 도시로 온 것이다.


하페즈에 대해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이런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완벽에 가까운 시를 쓰는 시인"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문학(특히 운문)에 대해 문외한인 나였지만, 대체 어떤 작품에 '완벽'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전율이었다.

그리고 이 때를 대비해 어제 WIFI를 사용할 수 있는 에람 호텔(Eram Hotel, 우리 숙소는 Wifi가 되지 않았다)에서 하페즈의 영문 번역 시를 갈무리해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하페즈 영묘(무덤)는 공원처럼 잘 꾸며져있기 때문에, 아무 벤치에나 주저앉아 그의 시를 곱씹으며 사색할 시간을 주는 멋진 장소이다.



이 하페즈 영묘 역시 도심 속에 존재한다.

바킬 바자르에서는 직선거리로 약 1Km 떨어져있으며, 도보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울창한 나무 한가운데로 길이 나 있는데, 이란 가족들의 소풍 장소로도 널리 쓰이는 듯 했다.



한낮의 소풍을 즐기고 있는 이란 가족들은 신기하게 생긴 장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위쪽 사진에 보이는 가스통이 그 것이다.


차를 데우기도 하고, 난을 굽거나, 간단한 음식을 요리하기도 했는데, 옹기종기 모여앉아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사랑스러워보였다.

게다가 가족단위로 앉아있는 이 사람들은 내가 지나가자 앉아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라고 말했는데(못알아들었지만 분명 그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테헤란에서 개구장이들에게 당했던 기억이 채 가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정중히 사양하며 웃으며 그 곳을 지나쳤다.


그때 나는, 뭐가 두려웠던 걸까?

설마 꼬마와 함께 있는 가족들이 이방인인 내게 독이 든 차를 주거나, 먹으라고 준 간식에 말도 안되는 돈을 달라고 요구할 것 같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분명 그 것과는 별개로 내 마음속에는 일종의 불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이 깨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페즈 그리고 와인]


시인 하페즈는 주로 사랑,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노래했는데, 신기하게도 술(와인)에 대해 예찬한 시가 많다.

그늘에 걸터앉아 천천히 그의 영문 번역판 시를 읽고 있던 중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인도를 떠나 지금까지, 대략 일 주일간 나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온 몸의 세포가 알코올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그 상태에서 하페즈가 쓴 술에 대한 예찬을 읽자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술 마시고 싶다, 술 마시고 싶다, 술 마시고 싶다'


머릿속에 시가 들어오지 않았다.

시를 읽기 위해 어렵게 걸어온 하페즈의 영묘 앞에서.

나는 그의 시를 읽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알코올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자조했다.



사실 이란이 금주국가가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이맘 호메이니를 필두로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이후 와인 생산 금지령이 떨어졌으니, 그 전에는 이란 사람들도 와인을 마셨던 것이다.

심지어 1994년 이란의 북부 자그로스 산맥에서 미국의 분자 고고학자인 패트릭 맥거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침전물(찌꺼기)를 발견했는데,

무려 기원전 5,400년경 만들어진 토기에서 발견된 와인 침전물이었다.


그보다 앞선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스꽝 스러운 상황이 펼쳐진다.

현재는 금주 국가인 이란이지만, 와인의 원산지이자, 와인을 가장 먼저 개발해 음용한 곳이 바로 이 곳인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곳의 명칭인 Shiraz는 까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삐노 누아르(Pinot Noir), 메를로(Merlot)와 함께 4대 적포도 품종과 이름이 같다.

(Syrah, Shiraz등으로 혼용해서 쓰인다)


느낌 오지 않는가?


물론 확정적으로 '정설'이라 불리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대략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13세기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 때, 이 곳 시라즈까지 왔던 군인이 포도 나무를 들고 프랑스의 론(Rhone)지방까지 가서 옮겨심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Shiraz품종은 프랑스의 론 지방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꽤나 설득력 있게 들린다.


둘째는 프랑스의 론지방에서 생산되는 것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 품종이 생산되고 있는데, 특히 호주에서 시작된 이 품종의 이름을 붙일 때,

과거 와인으로 유명했던 이 곳의 명칭을 따서 Shiraz라고 작명했다는 가설도 있다.



어떤 것을 믿던, 혹은 아무것도 믿지 않던 그 것은 여러분의 자유이다.

하지만 이 것 만큼은 진실이다.


"현재 시라즈(Shiraz)에서는 와인(Wine)을 마실 수 없다."


난 여기까지 사고의 틀을 확장하고 나서,

하페즈의 영묘 앞에서 그의 시를 읽을 때보다 더 큰 비애감에 잠겼다.

눈에서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까지 했었다.



가까운 미래에 이란에서 2차 백색 혁명이 일어나는 그 순간,

당장 시라즈(Shiraz)로 달려가서 Shiraz품종 포도 나무를 심어야겠다는 스피노자 적인 다짐을 한 채 유유히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