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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여행기/중동(Middle East)

(여행기/이란) 이스파한 여행 가이드

by 빛의 예술가 2017. 9. 5.

[사막의 옥상]


그런 질문 많이 받는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여행하면 빨래는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긴, 그냥 하면 된다.

귀찮을 때는 통째로 세탁소(Laundry shop)에 맡기기도 하고, 운좋게 세탁기가 있는 숙박시설에 묶게된다면 그 세탁기를 이용한다, 세탁과 건조가 척박한 환경(이건 추후 여행기에 쓰도록 하겠다)에서는 빨래를 포기하면 된다.

물론 거의 대부분은 손빨래를 해야한다.


난 온실 속의 화초처럼 매우 곱게 길러지고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빨래'가 뭔지 모른 채 17년 가까이 지냈었다.

아마 처음으로 '빨래를 해야겠구나'라고 느꼈을 때가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살던 시절이다.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냈는데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빨래란 걸 할 줄 몰랐다.

그제서야 '엄마'의 존재가 실감이 났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2년 뒤, 나는 외딴 사막의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있다.

물론 이제는 '엄마'가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이런 것들이 생각났다.


'와- 여기 빨래 진짜 잘 마르네? 와아.. 한 시간도 안된거 같은데'



(속옷 같은게 보이는 것 같지만 무시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뭐, 대충 수영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스파한이 아무리 오아시스 마을이라고 하지만, 지리학적으로 분류했을 때 역시 '사막 기후'에 가깝다.

매우 건조하고, 햇볕이 쨍쨍하다.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빨래를 한 후, 대충 물기를 제거하고 빨랫줄에 널어놓더라도 채 한시간이 지나지 않아 건조가 끝난다.


빨래를 개키며 생각했다.

'참 오늘이 이란 마지막 날이겠구나'




[이스파한 여행 가이드(?)]


마지막 날이었고, 빨래도 끝냈고, 더 이상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TOTIA호텔로 가서 와이파이 이용권을 구입했다.

선물받은 코카서스 3국 론니 플래닛으로 대략적인 정보는 얻었지만, 추가로 궁금한 정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곳에 가기 전에 맥주를 한 병 마시는걸 잊지 않는다.


(이란에서 찍은거 맞다, 저기 페르시가 적혀있다)


사실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혹은 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란이란 나라는 그리 추천할 만한 여행지가 못 된다.
첫 번째 이유로 술을 판매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 째 술을 금지하는 국가이기 때문이고, 셋 째 밀주를 구하더라도 '이거 잘못 마시면 골로 가는거 아냐?' 정도의 위기의식을 가진 채 시음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저 맥주는 무엇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뭐, 여러분들이 예상한 것처럼 무알코올 맥주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배부르기만 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장점도 있다.
'진짜 맥주 맛이 난다는 것'
(심지어 우리나라 맥주보다 더 맥주맛이 난다)

술을 금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알코올 홀릭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나라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곳에 오게되었을 경우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앗줄이 있다면 바로 '무알코올 맥주'일지도 모르겠다.




토티아 호텔에서 대략 1시간 정도 웹 서핑을 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왔다.

심지어 강연이가 소개해준 사람과는 연락조차되지 않았다.


'그냥 내 숙소에 가서 짐 정리나 하고,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그래도 소개를 받고 수 백, 아니 수 천 킬로미터를 날아서 오는 사람을 버리고 갈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만나서 밥이라도 먹고, 이 곳 정보는 좀 주고 가는게 예의겠지'


그 순간 거짓말처럼 예의바른 복장의 두 사람이 나타났다.

'뭐야? 한 명은 일본인이고 한 명은 한국인이잖아?'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왜냐하면 두 사람이 아래 사진처럼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복을 입은 쪽으로 다가가 물어본다.

"저기 혹시..."

-"아! 강연이가 소개해준 분이죠? 안녕하세요, 우리 지금 점심 먹으러 갈건데 같이 가요"

그렇게 난 자연스럽게(?) 이 사람들 틈에 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기모노와 한복을 제외하고, 일본인 남자도 두 명이 있었는데, 

'난 왜 이 나라에서 자꾸 여자2, 남자2의 무리에 합류하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속으로 던지고 있었다.



버스 시간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난 한복을 입은 Y(라고 칭하겠다)에게 이야기 했다.

"연락도 잘 되지 않고, 케밥이 너무 질려서요 사실 오늘 이란/아르메니아 국경 도시로 갈려고 티켓 끊어뒀어요"


그 순간 Y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가 싶더니, '터키에서 여기까지 날아 왔는데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되느냐?'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여행을 하다보면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어떤 사람들과는 헤어진 뒤에도 다시 길에서 만나기도 하며, 정말 운이 좋은 경우에는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보통 길에서 만난 인연은 길에서 끝나기 마련이긴 하지만 말이다.


마음이 흔들린 이유는 '그녀가 한복을 입고 이란에 도착한 초절정 미녀(?)였기 때문'같은 이유는 아니다.

(실제로 Y누나는 미인이다)

단지, 안나푸르나를 함께 올랐던 강연이에게 소개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일일 이스파한 여행 가이드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식사를 끝내고 일본 친구들과는 헤어졌다.

처음으로 체헬소툰 궁전을 소개하기로 결심하고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는데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한복을 입고있는 Y는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든 인기 폭발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Y가 걸어가던 중 아기가 보이면 이렇게 안아주고,



이란 현지인들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아기만 안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어른도 만나면 함께 사진을 찍는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거지 꼴(?)로 돌아다니는 나 역시 '동양인'이라는 이유 만으로도 많은 꼬마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줬었는데, Y의 인기는 짜르봄바처럼 가히 위력적이었다.

정말 다섯 걸음을 걸으면 사진을 함께 찍어주고, 또 열 걸음을 걸으면 사진기를 들이민다.


그렇게 우린 어렵사리 체헬소툰 궁전에 도착한다.



그렇게 체헬소툰 궁전과 이맘 광장, 알리 카푸 궁전을 설명하던 찰나 우린 또 다시 한 무리의 이란인들에게 초대를 받았다.

이번에는 사진을 함께 찍자는 권유가 아닌, 소풍을 하고 있는데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네 명의 이란 여자들이었는데, 가장 어려 학생처럼 보이는 쪽이 영어 통역을 담당했고(아마 정말 학생이었을 것이다) 우린 손짓과 발짓, 그리고 간단한 영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 남자인 나 혼자 돌아다녔다면 초대될 확률이 거의 없었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난 한복을 입고 있는 Y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Y는 사람들의 이름을 묻더니, 한글로 그 이름을 써서 선물했고,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이란 여자들은 로또 3등 당첨권이라도 손에 쥔 양 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Y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쉽사리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을 외향적, 내향적 기준으로 구분한다면 외향의 극에 맞닿아있음이 확실해보이는 사람이었다.


소풍을 즐기고 있던 여자들은 우리에게 간식까지 권했다.

단촐한 음식이었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웃으며 크게 한입 베어 물었는데 어마어마한 맛이었다.

실례를 무릎쓰고 '하나만 더 주면 안될까?'라고 말할 뻔했다.



정확히 이름도 모르고, 굉장히 맛있었지만

사실 그 음식 보다는 이렇게 소풍에 초대를 받아 이란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난 점점 이런 경험을 하게 만들어 준 Y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변경]


나의 야매(?) 여행 가이드는 끝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저 버스 시간이 다 되어 가서요"

- "안돼 안돼 가지마요"


"어떻게 미루더라도, 숙소도 체크아웃 했어요..."

- "그럼 제 숙소로 오세요, 난 침낭덮고 자면 되니까~ 아아아"



여행을 하다보면 빨래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이동해야하며,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먹을지도 고민해야한다.

비자를 발급받아야하는 나라에서는 비자 유효기간 내로 그 나라를 떠나야하며, 그런 부류의 나라인 이 곳에서는 기간에 맞춰 일정을 잡아야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계획일 뿐이다.


그 모든 계획이 뒤틀리는 경우엔 '변경'을 해야한다.



빛으로 물든 알리 카푸 궁전의 석양을 바라보며 난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이란 여행이 조금 더 길어지겠구나'



그렇게 우린 시오세 다리까지 걸어갔다.

이미 메말라버려 크게 실망했던 곳이지만, 역시 밤에 보는 시오세 다리는 장관이었다.



다리는 마치 거대한 극장처럼 변모했으며,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조화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엄청 큰 화면으로 그림자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난 한 사람 한 사람을 카메라에 담으며, 천천히 그림자 연극을 즐기기 시작했다.





다리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보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이렇게 낭만적인 장소가 또 있을까?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으며 밤의 적막에 고스란히 휩싸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마저도 조용한 음악처럼 들려왔다.

가끔(하지만 거의 항상) 찾아볼 수 있는 인종 비하 발언을 일삼는 꼬마들의 존재도 없었으며, 난 이 거대한 밤의 극장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마 Y와 헤어져 버스를 타고 타브리즈로 가버렸다면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그런 장면이었다.

그렇게 난 성공적인 계획 변경을 통해 이란을 조금 더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참, 

낮이든 밤이든, 복장과 장소를 불문하고

그녀의 스타성은 어디서든 빛 발하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