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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여행기/중동(Middle East)

(여행기/이란) 아비아네와 차라투스트라

by 빛의 예술가 2017. 9. 10.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외딴 잠]


잠에서 깨어났다.

난생 처음 보는 방이었으며, 10초 정도 '여기가 어딜까?'라고 생각했다.

그래 난 어제 처음 만난 이란인 택시 기사 집에서 잠을 잤었다.

'그나저나 Y는 잘 일어났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이 일이 데자뷰처럼 다가왔다.



10년도 지난 일이다.

2000년대 초반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한 달을 걸러 가출을 했었다.

부모님이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과연 그 행위를 '가출'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실제로 가출을 해서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요즘은 무전여행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각종 웹사이트나 커뮤니티에서 이를 비하하는 말로 '무전 거지', '거지여행'과 같은 자극적 용어를 사용하며 이런 말들을 한다.


"여행을 하려면 돈을 써야지, 왜 얻어먹고 빌붙고 다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진짜 거지들인가? 아오 극혐."


뭐 이 논리가 맞다면, 난 학창시절 가출을 할 때마다 거지꼴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넜었다.

8시간 씩 기차를 타고 달려야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도착할 수 있던 그 시절, 나는 기차 안에서 처음 본 남자에게 잠을 구걸했다.

순천이라는 처음 와보는 도시에 내려 술에 취한 남자의 가방을 대신 들어준 채 비틀거리는 남자를 따라갔다.

역전 골목의 'XX여인숙'이라고 적힌 곳이었다.

매캐한 냄새가 자욱한 그 남자의 방에는 조금 더 젊어보이는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술에 취한 남자는 그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아- 우리 조카 데려왔어, 하루 밤만 재울려고"


잃을 것 없고 깡 좋던 시절 난 처음 들어가본 '여인숙'이란 곳에서, 처음보는 남자 둘과 섞여 하나뿐인 침대를 차지하고 쿨쿨 잘도 잤었다.



2층 거실로 나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있으니 Y가 밖으로 나왔다.


"잘 잤어요? 무슨 일 없었죠?"

- "그럼요, 어서 준비해요. 오늘 아비아네로 가야하니까"




카샨에서 아비아네까지는 대략 80Km,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아비아네로 가는 길은 온통 사막이었다.

단조로운 색과 모습의 풍경이 계속해서 스쳐지나가고, 운전 기사 아저씨와 Y는 피곤한 듯 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데자뷰가 이어졌다.


술에 취한 그 남자는 마산 혹은 창원에서 기차에 탑승했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나의 정체를 물었었다.

"고등학생이 왜 학교는 가지 않고 여행을 하고 있느냐?"

(그땐 방학 기간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되, 중요한게 있다. 나중에 돈을 벌면 그걸 전부 달러로 바꿔둬야 한다. 달러를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그땐 어렸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당시, 원-달러 환율이 미친 듯이 뛰었던 적이 있었다.

과연 남자는 그런 단편적인 사실 만으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혹은 통화/화폐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아낼 수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년 후, 내가 사회에 진출하고 취업을 했을 때 달러로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술취한 라이오스, 그럼 나는 달러를 쥔 오이디푸스인가?'


카샨-나탄츠 프리웨이를 계속해서 달리던 중 교차로를 통과하면 마을이 하나 둘 씩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처음 보이는 마을이 한잔(Hanjan), 우리가 지금 가는 아비아네는 6번째에 위치한 마을이다.




[아비아네, Abyaneh]


이 곳의 첫 인상은 온통 붉은 빛이 감도는 흙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카샨이 황토빛으로 물들어있던 것과는 또 다른 색감이었다.


이 곳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마을이었는데, 중세 페르시아 (약 3~7세기) 사산 왕조의 흔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 곳에 도착한 우리는 그런거 이해할 리가 없고, 봐도 모른다. 

운이 좋아 설사 흔적을 찾더라도 아키메네스 왕조 시절과의 차이점은 쉬이 구분할 수 없다. 

해야할 일은 온통 붉은 빛으로 색칠 된 아기자기한 산속 마을을 보며 천천히 걸으면 된다.




우리가 고용한(?) 택시 기사 아저씨는 자주 이런 투어상품을 판매하는 듯 보였다.

이 곳에 대해 꽤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신기했던 것이 문고리였다.


"이거 봐봐, 이게 이 곳 전통 문고리인데 사람들이 노크할 때 문고리를 톡톡 치잖아?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남자가 잡는 문고리, 여자가 잡는 문고리 이렇게 따로 구분 되어있다는거지"


설명을 듣고 문고리를 봤는데 좌우 모양이 정말 달랐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겨났다.


"모양이 다른건 알겠는데, 집 주인이 소리를 듣고 구분할 수 있어요?"


운전사는 '당연하'다고 말하며 노크를 해보라고 한다.

확실히 여자쪽은 얇고 가는 소리가 울렸으며, 남자쪽은 묵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아비아네가 가장 유명한 이유는 조로아스터교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마쳤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조로아스터교'란 단어를 들어봤겠지만 그 것이 무엇인지는 모를 것이다.

(우리 교육과정이 대부분 그런 식이니 어쩔 수 없다)


설명하자면 복잡하다.

간단히 말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며, 자연 친화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불을 숭배하는 종교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데, 기초 자료가 매우 부족해 현재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는 점 정도만 이해하면 된다.

과거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종교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이 마을에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이 곳을 즐기기에 필요한 배경 지식이다.


그리고 신기한 사실은 수 천년 전부터 이 사람들은 건물 외벽을 십자가 모습으로 꾸몄는데, 벽돌을 엇갈리게 쌓아 완성한 모습이다.



역사학자들이 이 십자가와 기독교의 그 것과 연관성을 연구하고 있지만, 정론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학설은 나오지 않았다.

붉은 빛의 벽돌 안에 비춰지는 새까만 십자가는 예나 지금이나 이 곳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그렇게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다 보면 저 멀리 숲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가야할 곳도 그 곳에 있다.



도로를 지나고, 개울을 지나고, 지붕으로 둘러싸인 건물을 지나다 보면 주민들이 간간히 보이는데,

이런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21세기에 아직도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등장부터가 충격적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운전기사와 몇 마디 대화를 한 뒤 유유히 나귀를 타고 사라졌다.


마을 뒤편에는 이렇게 울울창창한 나무가 빼곡히 서 있다.

그 말은 이 곳 역시 오아시스 마을이라는 것이다.



이런 나무 뿐만이 아니라, 복숭아 나무, 호두 나무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지나가던 중 호두 열매가 계속해서 떨어졌다.


"기사 아저씨, 이거 떨어졌는데 우리 가져가도 되요?"


우리의 질문에 남자는 흔쾌히 OK라고 말한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비닐 봉투를 가져와 복숭아와 호두를 주섬주섬 담아서 Y에게 준다.



난생 처음 본 호두 열매

밤송이는 어릴 적 몇 번이나 발로 까본 기억이 있지만, 호두가 이런 식으로 자란다는 것은 이 때 깨달았다.


Y는 다람쥐라도 된 것처럼 떨어진 호두를 비닐 봉지에 수집하며 계속해서 걸어갔다.

간간히 복숭아를 발견하면 '복숭아~'를 외치며 호두와 나란히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숲을 지나 마을을 바라보면 이런 모습이 펼쳐진다.



온통 붉은 빛의 흙으로 지은 집들과 새파란 나무가 정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모습은 산의 거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찍은 사진이며, 점점 높이 올라갈 수록 마을이 또렷하게 보이기 때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이 좋다.


우린 다시 마을로 돌아갔는데, Y는 여기서 또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곳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할머니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Y는 페르시아 말을 할 줄 모른다.



아비아네 전통의상은 이처럼 매우 아름다운데, 현대 이란 여성들이 검은색 히잡을 뒤집어 쓴다면, 이 사람들은 하얗고, 꽃으로 수가 된 히잡을 쓴다. 치마 색깔도 알록달록하다. 


할머니는 Y가 맘에 들었는지 계속해서 웃으며, 마지막엔 작별의 키스까지 해 주었다.

(이란에서 이런 광경은 처음 봤는데, 왼쪽 할머니가 계속 웃고 있는걸로 유추해 볼 때 이 곳, 아비아네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비아네가 유명한 이유는, 프리드리히 니체에 있다.

사실 니체는 이 마을에 와본 적이 없겠지만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영문식 표기다.


이 책은 거의 모든 장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끝을 맺는데,

1장에 현자인 자라투스트라가 인간의 정신 변화(혹은 발달)과정에 대해 서술한 것이 있는데, 그 것이 유명한 낙타-사자-어린아이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의 정신을 가지고 있을까?

'아직까지 낙타인 채로 여행을 하는 중일까, 사자가 되었을까, 어쩌면 어린아이로 되어가고 있는걸까?'


과거 조로아스터 교인이 끝까지 살아남아 생활했다던 이 곳에서 난 곰곰히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시 카샨으로]



카샨으로 돌아오자 익숙한 황토빛의 흙집이 우릴 반겼다.

그리고 이제 Y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Y는 운전기사 아저씨와 조금 더 이 근교를 여행할 셈이라고 했으며, 나는 비자 문제만 아니라면 조금 더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미안하다고 얘기했다.

숙박비는 지불했지만, 잠은 자지 않았던 호스텔로 돌아가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한다.


'정 들만하니 이란 여행이 끝나는구나.'



난 운전기사와 Y에게 작별인사를 하곤, 재빨리 샤워를 끝마쳤다.

이 곳에서 아르메니아 국경마을까지 가기위해선 또 다시 열 시간을 넘게 달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 버스 티켓을 사러 간다.

카샨 버스 터미널에는 라쉬트, 쿰 테헤란, 이스파한, 쉬라즈와 같은 목적지 표를 구할 수 있고, 타브리즈 행은 없었다.

쿰(Qom)으로 가면 타브리즈 행 버스표를 살 수 있다고 들었으나, 테헤란으로 도착한 뒤 국경도시 졸파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이 곳에서 테헤란까지는 대략 2~3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던 글씨도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숫자는 100% 해석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시간과 요금, 플랫폼 넘버라던가, 버스 번호를 전부 이해할 수 있었고, 여유만만해진 나는 콜라를 마시며 선물받은 론니 플래닛을 펼쳤다.






Edition이 최근의 것이었기 때문에 이 책만 있다면 코카서스 3국을 여행하는데는 무리가 없을거라고 생각한 채, 

처음으로 도착할 국가인 아르메니아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곳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맥주를 마셔야지.'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출발 시간이 다다랐다.

마지막까지 이란은 내게 깔끔하고, 빠르고, 계속해서 간식을 던져주는 멋진 버스를 선물해 주었다.



이제 이란 여행이 정말로 끝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이스파한에서 함께 소풍을 즐겼던 그 사람들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시라즈에서 헤어진 그 한국인 아주머니는 터키에 잘 도착 했겠지?'

'카샨의 귀염둥이들은 지금쯤이면 집에 들어가 잠을 청하겠지'

'테헤란에서 만난 영약한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잘 지내고 있으려나?'

'Y는 오늘도 운전기사의 집에서 잘려나?'


거기까지 생각하자, 난 또 다시 데자뷰에 빠진다.


대한민국 순천, 한 여인숙에 묶고 있던 이름 모를 내 삼촌은 지금쯤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해졌다.

당신의 조카는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외딴 곳에 도착했다.

그때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 보는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고 잠까지 잤다.

그래서 당신이 생각났다.



이름모를 내 삼촌은 나를 여인숙으로 데려가기 전 그렇게 말 했었다.

술에 취한 채 혀가 조금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아 근데~ 학생.. 아무리 잘 곳이 없어도 글치, 이렇게 처음보는 사람이 가자고 해도, 원래 따라가면 안되는겨~ 세상이 이거 점점 험악해지고.."


그 당시, 남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난 처음보는 그 사람을 따라 여인숙으로 가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내가 지금 사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아비아네와 조로아스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