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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여행기/코카서스(caucase)

(여행기/아르메니아) 세상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 & 타테브 수도원

by 빛의 예술가 2020. 7. 18.

고리스에 도착해서 숙소(Lyova&Sons B&B)에 짐을 던져놓고 마을 산책을 했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내게 호기심을 보이는 꼬마들과 즐겁게 놀았으며, 이란을 여행하며 질리도록 먹었던 케밥에서 벗어나 빵과 소시지, 버터와 맥주로 첫날 저녁을 먹었다.

그렇다. 나는 저녁과 함께 술을 마신 것이다.

 

감동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샤져 공항을 경유하면서부터 이란을 여행하는 내내 알코올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심지어 맥주를 한 모금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먼 훗날 이란의 쉬라즈(Shiraz)에서 와인을 다시 생산하기 시작한다면, 가장 먼저 달려가서 하페즈의 시를 읽으며 와인을 마셔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건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다.

당장 아르메니아에서 마시는 맥주가 내겐 소중했다.

 

 

국경을 넘는 여행을 한 탓인지 식사 후 이내 잠에 곯아떨어진다.

그리고 아침,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가자 호스트인 Lyova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 종류의 빵과 비스킷, 소시지, 삶은 계란이 메인이었고 버터&치즈, 크림, 꿀도 마련되어있었다.

소박해 보이지만 충분히 군침 돌게 만드는 식사였다.

 

 

어제는 만나지 못했지만 이 숙소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묶고 있었다.

나는 이날 프랑스에서 온 세실, 이탈리아에서 온 안나 마리아와 함께 아침을 먹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여행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디에서 왔느냐부터, 어디가 좋았냐, 어디를 갈 예정이냐 따위의 여행자들이 하는 흔한 질문.

그리고 세실이 내게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그런데 Moon(내 영어 이름)은 오늘 뭐 할 거야?"

 

생각한다.

오늘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사실 아르메니아의 고리스(Goris)에 온 이유는 한 가지였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까지 한 번에 이동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아르메니아의 남쪽 동네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정이 없다는 내 말에 세실과 안나 마리아는 웃으며 함께 여행하는 게 어떻냐고 물어본다.

이미 택시를 한대 대절해뒀으며, 비용은 n빵으로 하자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를 탈 것이며, 그 끝에서 볼 수 있는 타테브 수도원, 그리고 악마의 다리를 구경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이라고 한다.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나도 같이 갈래"

 

 

하루 동안 우리의 발이 되어준 클래식한 자동차.

나는 이렇게 선이 반듯하고 딱딱하게 생긴 차가 좋다, 지프의 랭글러나, 벤츠의 G바겐처럼.

하루 동안 택시 대절 비용은 9,000 AMD (약 22 USD)였으니, 나는 3,000 드럼 (AMD)를 지불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세실은 불어과 영어를 섞어 말하며 빨리 출발하자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면 10대 후반, 많아 봐야 20대 중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그에 반해 이탈리아에서 온 안나 마리아는 하얗게 센 머리 때문인지 5~60대 정도로 보였으며, 웃는 얼굴에 항상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는 여자였다.

 

그렇게 우리 셋은 아르메니아 고리스(Goris)에서 타테브(Tatev)로 천천히 출발한다.

 

고리스(Goris)에서 세상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가 있는 타테브(Tatev)까지는 택시로 대략 40분~1시간이 소요된다.

이동하는 도중 Barev Trail이라는 하이킹 코스가 있는데, 악마의 다리(Devil's Bridge)에서 타테브(Tatev) 마을까지 이어지는 협곡을 잇는 길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걸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안나 마리아의 새하얀 백발을 보며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노인을 공경하는 한국에서 온 예의 바른 청년이니까.

 

그렇게 택시는 협곡을 달려 우리를 타테브 케이블카 시작 지점에 데려다준다.

이후 택시가 되돌아가길래 나는 두 사람에게 묻는다.

 

"이게 9,000 AMD야?"

 

세실과 안나 마리아는 웃으며, 그게 아니라 택시는 케이블카의 도착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얘기한다.

민망한 기분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사실 두 사람에게 조금 미안했다.

분명 오늘 여행을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준비도 많이 했을 텐데, 내가 불현듯 나타나 무임승차를 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케이블 카 기본 정보

  위치 : 아르메니아(Armenia) 타테브(Tatev) - 하리조(Halidzor)

  명칭 : Wings of tatev

  시간 : 12~15분 (편도)

  길이 : 5,752m

  인원 : 25인 수용 가능 (해설자 1인 제외)

(기네스북 세계 기록 인증)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있다는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에 도착했다.

한국의 남산이나 설악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 특별할 것 없이 생긴 케이블카였지만, 아래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괜히 기네스북에 등재된 곳이 아니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찔한 위치였다.

 

아르메니아 타테브 전경

먼저 아르메니아의 산골 마을 타테브(Tatev) 전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이후 뒤쪽으로 장엄하게 뻗어있는 산과 골짜기는 절로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탄성이라 하면 자연에 대한 경탄 반, 그리고 케이블카가 추락하면 이유 불문하고 즉사하겠다는 두려움 반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케이블 카 가격

  편도 : 3,000 AMD (약 7~8 USD)

  왕복 : 4,000 AMD

  무료 : 어린이(7세 미만)

(이 나라 국민이나 이 지역 사람은 500 AMD만 내면 탈 수 있다고 적혀있다(고 추측한다). 아르메니아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래 사진 셋째 줄을 읽고 해석 좀 해주면 좋겠다)

 

 

우리는 대절한 택시가 케이블카 종착점에서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기 때문에 편도행 티켓을 산다. (3,000 AMD)

티켓 디자인이 굉장히 예뻤다.

다양한 청색 계열을 배치하여 심플하지만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었다.

찬찬히 뜯어보자 Wings of Tatev라는 글씨가 보였는데, '타테브의 날개들'이라니 이름 참 예쁘게 지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Wings of Tatev one way ticket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으며, 우리 셋을 포함해 케이블카 해설사 하나, 그리고 4~5명의 사람이 추가로 케이블카에 탑승한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안나 마리아, 세실

 

 

케이블카는 이렇게 생겼다

케이블카에 탑승하자 타테브(Tatev)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케이블이 연결된 끝을 찾아봤지만,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거리였다.

그렇게 끝도 보이지 않는 케이블을 따라 우리는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한다.

 

해설사가 한 명 동승하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설명을 해준다. 

다행스럽게도 영어로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대략적인 정보는 모두 인지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어로 설명해줬다면 1도 이해하지 못했겠지)

 

뒤를 돌아보자 '벌써 이만큼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케이블카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숲속 위를 지나는 케이블카

 

대략 이런 모습으로 케이블카가 움직인다.

동영상을 준비하였으니, 궁금한 분들은 아래 영상을 보시면 된다.

똑(딱이 카메라로 촬영했음을 감안하고 감상 부탁드린다.)

 

 

길고 가파른 골짜기를 지나, 좁은 폭으로 유유히 흐르는 계곡이 보였고, 시시각각 변하는 사방의 경치에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탄성을 질렀다.

해설가는 쉴 새 없이 이 곳의 경치와 대략적인 역사, 유명한 관광지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공중에서 온 몸으로 자연을 느끼고 있는 내게 그런 설명은 필요 없었다.

 

"자연은 가치 판단이 필요 없이 그냥 보고 느끼면 되는 거니까."

 

10여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타테브 수도원(Tatev Monastery)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여행하며 느낀 사실이지만, 이 지역의 절경에는 항상 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국립공원, 각지의 비경에 속속들이 절이 위치해 있는 것처럼, 이 지역의 자연, 역사와 함께해온 건축물이 교회인 것이다.

 

 


그렇게 케이블카의 끝에서 우리는 타테브 수도원을 만났다.

이 곳의 간단한 역사는 아래 요약해두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침략과 복원, 붕괴와 복원의 시간을 반복해온 곳이 바로 이 타테브 수도원이다.

 

 

- 타테브 수도원(Tatev Monastery) 역사

  9세기 : Syunik지방 주교에 의해 최초 건립

  11세기 : 1,000여 명의 종교인과 예술인들이 사는 곳으로 확장

  12세기 : 셀축 투르크 제국 침략 및 지진으로 붕괴

  13세기 : 복원

  14세기 : 대학교 건립으로 타테브(Tatev)는 아르메니아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

  15세기 : 페르시아의 군주 Shan Rukh에게 침략

  17~18세기 : 복원

  1931년 : 대지진으로 붕괴 & 복원

 

 

 

세실, 안나 마리아와 함께 타테브 수도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돌아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천년 전에 만들어진 벽돌과, 천년 후에 만들어진 벽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붕괴 후 아직 복원되지 못해 폐허처럼 보이는 공간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절벽 꼭대기에 만든 수도원이나 교회 그 자체도 멋졌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돌로 한층 한층 쌓아 올린 벽이었다.

그 벽들은 절벽의 끝과 끝을 연결하고, 수도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데 수도원에서 볼 때는 모든 걸 볼 수 없다.

이 곳에서 악마의 다리 방면, 타테브로 돌아가는 길에 산 중턱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 포스팅의 마지막 사진에서 그 절경을 볼 수 있다.

(타테브에 방문하게 되면 꼭 수도원 옆에 있는 산 중턱으로 가보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뷰 포인트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아치형의 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나, 비죽 튀어나온 돌로 수평을 맞추기 위해 애쓴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이 울창한 자연과 더불어 빛나고 있었다.

 

타테브 수도원의 돌벽
곡식을 빻기 위해 존재하는 방아

수도원 내부에는 우리나라 민속촌 같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연자방아'를 발견했는데, 생김새가 거의 흡사해서 놀랐다.

하긴, 어느 나라나 곡식을 찧거나 빻을 때 말과 소의 힘을 이용해 쉽게 작업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겠지.

그런데 저렇게 원통형의 돌 가운데를 뚫어 나무로 고정시키고 원형으로 돌릴 수 있게 만드는 건 누가 시작한 걸까? 

아주 먼 옛날에도 분명 지역 간, 대륙간의 교류가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그렇게 아르메니아의 외딴곳에서 연자방아를 보며, 수천 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우리나라 민속촌을 생각한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연결되어있다.'

 

천년이 넘게 붕괴되고 복원되었던 건물이라, 건축 양식도 다양했는데, 비잔틴 양식, 카프카스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건물을 돌아 다른 건물을 보면 이건 로마네스크 양식 같고, 고딕 양식 같기도 하다.  (사실 뭐가 맞는지는 역사/건축 전문가가 아니면 잘 알 수 없지만) 

이 곳을 천천히 걸어 다니는 동안, 그렇게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달리 복원된 모습을 찾아가며 색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오전 일정으로 타테브로 이동해, 세상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를 탔고, 웅장한 산과 골짜기, 그 벼랑 끝에 자리 잡은 타테브 수도원을 천천히 감상했다.

세실과 안나 마리아는 쉴 새 없이 내 감상을 물어봤고, 그때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영어로 열심히 느낌을 표현했다.

분명 저 사람들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데, 왜 이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모르겠다.

(영어가 라틴어에 기반한 언어라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본다)

 

 

타테브 수도원을 떠나 악마의 다리로 향하며 타테브 수도원이 한눈에 보이는 뷰 포인트를 찾아냈다.

우리는 택시기사에게 여기서 잠깐 멈춰달라고 이야기한 후, 그곳에서 한참 동안 수도원을 바라봤다.

 

타테브 수도원

 

긴 시간 동안 외세에 침략받고, 자연에 무너졌지만 쌓아 올리고, 다시 무너지길 반복했던 이 곳.

벼랑 끝에 위치해 있지만 조금도 위태롭지 않아 보이는 이 곳.

 

천년의 시간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 타테브 수도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