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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여행기/코카서스(caucase)

(여행기/아르메니아) 악마의 다리와 저녁 파티

by 빛의 예술가 2020. 7. 19.

세실과 안나 마리아가 계획한 일정은 잘 짜여있었다.

아침에 고리스(Goris)를 출발, 타테브(Tatev)로 이동해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를 타고 타테브 수도원으로 이동.

그곳을 관람하고 악마의 다리로 이동해서 짧은 트레킹을 하고, 하리조 전망대(Halidzor observation deck)에서 하리조&타테브 마을을 관람 후 고리스(Goris)로 복귀하는 일정이었다.

 

타테브 수도원을 봤으니 이제 악마의 다리(Devil's Bridge)로 이동할 차례다.

타테브 수도원 관련 여행기는 아래 링크 참조

.

https://dowhatthouwilt.tistory.com/395

 

(여행기/아르메니아) 세상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 & 타테브 수도원

고리스에 도착해서 숙소(Lyova&Sons B&B)에 짐을 던져놓고 마을 산책을 했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내게 호기심을 보이는 꼬마들과 즐겁게 놀았으며, 이란을 여행하며 질리도록 먹었던 케밥에서 벗

dowhatthouwilt.tistory.com

이 곳은 악마의 목구멍이라고도 부르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를 타고 잠깐씩 내려서 보는 투어로 이 곳을 여행하는 건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멋진 풍경이 펼쳐지긴 하지만, 시간에 쫓긴다는 압박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택시기사는 뷰 포인트 몇 군데를 알려준 후 팔짱을 끼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린다)

 

추천하는 코스는 타테브(Tatev)나 하리조(Halidzor)에서 1박을 하며 케이블 카(Wings of Tatev)를 타고, Barev Trail 코스를 직접 걸어보는 것이다.

도로 폭은 좁지만 차들이 많지 않아 비교적 한산하고 평온하게 산책할 수 있는 코스이다.

 

 

타테브 수도원에서 악마의 다리(악마의 목구멍)은 10여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처음 악마의 다리(Devil's Bridge)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뭔가 아찔하고 사악한 느낌이 드는 기괴한 다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기암괴석이 펼쳐진 것은 알겠는데, 대체 다리가 어디 있는 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해서 택시기사에게 다리(Bridge)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봤지만 흐르는 계곡을 가리킬 뿐이었다.

어랍쇼.

세실과 안나 마리아에게 물어본다.

 

"돌과 절벽, 흐르는 계곡이 멋지긴 한데, 왜 이름에 다리(Bridge)가 들어가 있는 거야?"

 

영어 실력이 뛰어난 '프렌치 걸'(안나 마리아는 항상 세실을 이렇게 불렀다) 세실은 웃으며 내게 설명해준다.

 

"Bridge는 다리라는 뜻도 있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연결한다는 의미도 있어"

 

 

사실 당시에는 세실의 설명이 잘 이해되진 않았다.

어쨌든 서로 연결하려면 뭔가가 필요한데, 그 '무엇'을 상징하는 장소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암이 흐르다 굳어 만들어진 화산암이 켜켜이 쌓여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계곡을 바라보며 내 궁금증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좁은 포장도로지만 교통량이 적기 때문에 우리는 도로 한복판을 가로질러 걷기도 하고, 감상도 이야기하며 천천히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건, 타테브 수도원만이 아니었다.

타테브 수도원을 둘러싼 자연 공간 그 자체가 천년이 넘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혹자는 세계 어디를 가든 수 억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지 않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다.

 

당연히 그 말이 맞다.

하지만 그런 '시간의 퇴적'이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곳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곳도 분명 존재한다.

그 미묘한 차이를 내 졸필로 설명하긴 힘들다.

서울을 여행하며 관악산에 오르는 여행과 제주를 여행하며 한라산에 오르는 여행 정도의 차이랄까?

 

 

그렇게 억겁의 시간 동안 용암이 흐르고, 흐르던 용암이 굳어 퇴적되고, 스치는 물에 깎이고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 쌓이기를 무한으로 반복하며 형성된 이 곳, 타테브의 악마의 다리였다.

 

 

그리고 당일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찾아본 타테브 관광청 악마의 다리(Devil's Bridge) 설명에는 아래 사진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 곳은 내가 위에서 추천한 Barev Trail코스이기도 하다)

굽이치는 도로에 층층이 퇴적된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짙푸른 색의 계곡이 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내가 서 있던 곳이 다리였구나."

 

출처(source) : https://www.tatever.am/en/devils-bridge

우스웠다.

다리 위에서, 그리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며 주변만 바라봤을 뿐, 그 자체가 다리라는 사실은 당시에 인지할 수 없었다.

내가 그 거대한 다리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렌치 걸, 세실은 이 사실을 알고 내게 Bridge의 또 다른 정의를 말했던 걸까?

 

 

당일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하리조 전망대(Halidzor observation deck)였다.

이 곳도 타테브 수도원과 비슷하게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석조 건축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곳이다.

악마의 다리에서 천천히 걸어가면 20~30여분 가량 소요된다.

 

코카서스 3개국을 여행하며(아제르바이잔은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느꼈던 사실은 이 지방의 건축물은 자연환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태생적인 욕망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망이 좋은 곳에 무언가를 건축하려 하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듯하다.

 

 

하리조 전망대(Halidzor observation deck)

 

먼 산이 보이고, 절벽 홀로 서 있는 석조 건축물을 향해 한 걸음씩 나간다.

그 순간순간이 절경이다.

맑은 공기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펜스 사이를 지나가면 어느덧 하리조 전망대에 다다른다.

 

멀리서 봤을 때 보다 훨씬 높고 큰 석조 건축물이었다.

그곳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서로 여행의 끝을 아쉬워했다.

 

하리조 전망대(Halidzor observation deck)

 

마지막 일정이었던 하리조 전망대(Halidzor observation deck)에서 자연이 만들어 낸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풍경을 뒤로한 채 우리는 고리스(Goris)로 돌아가는 택시에 탑승했다.

시간이 갈수록 기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졌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났다.

 

'우리에겐 아쉬운 시간이지만, 이 사람에게는 하루 일과의 끝이 다가오는 거겠지'

 

하지만 택시 기사의 그 평온한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소떼들이 도로를 점거한 채 택시기사의 퇴근을 방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사님의 퇴근을 막는 소떼들

분명 방금 전까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었는데, 소떼들이 길을 가로막자 기사의 얼굴에는 짜증 섞인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이 색다른 모습이 신기해 계속해서 셔터를 눌렀고, 기사는 클락션을 눌렀다.

 

여행자인 내게는 이런 모습이 정말 멋졌다.

책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소똥 냄새도 조금 났으며 그들이 발을 맞춰 걸어가는 진동, 가끔 캉캉거리며 소떼를 바른 방향으로 모는 강아지 두 마리와 말을 타고 진두지휘를 하는 남자의 늠름한 모습.

 

쉽사리 경험할 수 없는 이 풍경에 내 모든 감각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셔터를 누르는 나와는 반대로 택시기사는 계속해서 클락션을 눌러 내 집중을 흩트린다.

결국, 이 부대를 지휘하는 말을 탄 장군은 능숙한 솜씨로 소떼들을 우측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그 모습조차 신기해서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말을 탄 장군을 바라봤지만, 택시 기사는 익숙한 일상이라는 듯 가속과 감속을 반복하며 대열의 왼쪽으로 길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에겐 눈을 뗄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이지만, 누군가에겐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일상.

 

프렌치 걸, 세실이 말해줬던 Bridge의 정의가 다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연결되어있다.

그렇게 우리는 소들의 행렬을 뒤로한 채 고리스(Goris)로 복귀한다.

 

 

 


아침부터 낌새를 차렸지만, 세실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으로 넘어갈 거라고 얘기하며 열심히 배낭을 꾸린다.

나와 안나 마리아는 그녀를 숙소 옆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주기로 한다.

 

버스가 다가오고 나는 손을 흔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세실과 안나 마리아는 비쥬(볼 뽀뽀)로 작별 인사를 하기 시작한다.

'어라?'하고 생각을 시작하기도 전에 세실은 내게 다가와 똑같이 작별 인사를 한다.

오른쪽 한번, 왼쪽 한번.

 

내 인생 최초의 비쥬였다.

 

하지만 이딴 것(?)으로 내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중동을 벗어난 지 하루 만에 색다른 경험을 많이 하는 하루구나' 생각했고 세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을 뿐이다.

(음.. 솔직히 얘기하면 심장은 좀 뛰었다)

 

세실은 버스에 타고 아제르바이잔으로 떠난다.

안나 마리아와 나는 고리스 마을을 천천히 산책하며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는데, 내일 예레반(Yerevan)으로 넘어가는 표를 미리 예약한다고 말했다.

나 같으면 시간만 알아보고 찾아갔을 텐데, 안나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미리 전화번호를 알아뒀으니, 전화 예약을 해야겠다고 말하며 지나가는 행인에게 전화를 빌려 통화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나 마리아는 계획적인 여행을 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나 역시 내일 예레반으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내 자리도 함께 예약해주는 친절을 보여준다.

 

핸드폰을 빌려준 아르메니아 고리스 주민

두 사람이 사용하는 핸드폰은 매우 흡사하게 생겼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사용하던 저가 기종이었다.

내가 당시 사용하던 핸드폰은 아이폰5였는데, 항상 최고, 최신만을 고집하는 내게는 생경한 장면이었다.

안나 마리아는 유창한 영어로 내일 예레반행 미니 버스 두 좌석을 예약했고, 전화를 빌려준 행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저녁식사에 생맥주를 마시며 오늘 여행했던 일들, 내일 예레반으로 가면 어느 곳을 갈지 서로 얘기했다.

세계일주 중이며, 이탈리아도 지나갈 것이란 내 말에 안나 마리아는 아르메니아 여행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갈 것이며, 트리에스테(Trieste)에 살고 있으니, 꼭 한번 들르라며 메일 주소를 적어줬다.

 

지도를 보니 베네치아(베니스)와 가까운 도시였다.

이탈리아에 가면 만날 친구가 생겼고, 햄버거와 맥주가 맛있었기 때문에 더 기분이 좋았다.

 

 

식사 후 샤워를 마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적고 있으니 밤이 깊었다.

담배를 필 겸, 내가 좋아하는 장소인 마당 정원으로 나가자 술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란 남자 1명, 조지아 남자 1명, 폴란드 커플, 그리고 독일 여자 1명, 프랑스 여자 1명이 있었는데, 조지아 남자가 나를 보더니 빨리 자리에 앉으라고 이야기한다.

담배 불을 붙이기도 전이었다.

 

마당에 놓인 테이블에 앉자마자 일행은 웃으며 내게 술을 건넨다.

 

"이거 엄청 독한 건데 마실 수 있을까?"

 

조지아 남자가 웃으며 내게 작은 잔을 건넨다.

내 음주 인생이 10년이 넘었고, 안 마셔본 술이 없다. 

입꼬리를 올리며 잔을 받아 한번에 마신다.

 

일행은 소리를 질러대며 박수를 쳤고(이미 많은 사람이 만취한 상태였다) 그제야 다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가끔 폴란드 커플은 조지아 남자와 알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했는데, '너희 대체 무슨 말로 이야기하는 거냐?'는 내 질문에 폴란드 여자는 러시아말이라고 알려줬다.

심지어 폴란드 커플은 영어도 유창했는데, 그렇다면 최소한 3개 국어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나도 3개 국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이지만(사실 생존 회화 수준), 진짜 3개 국어를 하는 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뭔가 주눅 드는 느낌이 들어 술을 더 마셨다.

 

우리가 마시는 술은 조지아 보드카였는데, 향이 좋고 산뜻한 끝 맛을 남겼으며 목 넘김이 굉장히 편했다.

조지아 남자는 조지아 항공이 자주 추락했던 사실과, 그 항공사의 당시 광고 슬로건을 비교하며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당시 조지아 항공 광고 슬로건은 "안전한 항공사, 조지아 항공"이었다고 한다.

 

서투른 영어였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했고(조지아 남자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걸 온몸으로 표현했다, 몇 차례나), 주위 사람들을 빵 터트릴 수 있을 정도로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란 남자는 이란에도 열대우림이 있다고 주장했고, 폴란드 여자는 중동에 그딴 게 어디 있냐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열대 우림의 정의가 뭐냐는 내 질문에 폴란드 여자는 "hmmm. Tropical?"이라는 말로 우리를 모두 수긍시켰다.

Tropical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정확했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참석한 술자리였기 때문에 사진은 한 장도 찍지 못했다.

그만큼 나는 그 자리에 집중했었고, 웃었고, 즐거웠다.

시간이 지나 독일 여자는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해먹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폴란드 커플은 방으로 들어갔다.

남은 사람들은 끝까지 술을 마셔대고 있었는데, 나도 취기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에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간다.

 

 

둘 째날 술 파티가 열렸던 Lyova&Sons B&B의 정원

 

둘째 날 아침식사는 정원에서 먹었는데, 아래 사진 좌측부터 이란 남자, 폴란드 남자, 폴란드 여자.

나머지는 사진이 없다.

특히 유머 감각이 넘쳐흐르던 조지아 남자의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그렇게 아르메니아 여행 둘째 날이 저물어간다.

아침과 저녁, 두 가지를 연결하는 다리(Bridge)를 생각했다.

Bridge의 또 다른 정의를 알려준 세실과 작별하며 했던 비쥬도 떠올랐다.

 

'아침 식사부터, 저녁 술자리까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연결된, 즐거운 하루가 있다면 그게 오늘이겠지.'

 

생각하며 트윈베드 중 마음에 드는 쪽을 골라 잠에 곯아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