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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여행기/코카서스(caucase)

(여행기/아르메니아) 예레반 근교 여행 & 오케스트라 관람

by 빛의 예술가 2020. 7. 22.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 구입해둔 오케스트라 티켓이 생각났다.

사실, 이 나이가 되도록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공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걱정도 됐다.

큰 배낭, 작은 배낭 하나에 모든 걸 때려 넣고 다니는 부랑자 같은 내가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드레스 코드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표를 구입할 때 물어볼 걸 그랬다.

하지만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내가 예매한 티켓 가격은 2달러 (1,000 AMD) 였으니까.

 

'하긴 2천 원짜리 공연인데, 뭐 그리 대단하겠어?'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은 점점 비중이 작아졌으며, 오늘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 론니 플래닛에 체크하기 시작한다.

 

멋진 야경을 자랑하던 예레반의 건물들은 인공의 조명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벌써 유럽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곳의 청소부가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는 건지, 사람들의 환경 의식이 투철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담배꽁초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청결히 관리되고 있는 도로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 론니 플래닛에서 발견한 예레반의 관광명소는 일루미네이터 대성당, 러버스 파크, 치체르나카베르드(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관), 아르메니아 정교회 몇 군데 등이 있었는데 지도를 봤을 때, 모두 옹기종기 모여있어 도보로 충분히 이동 가능해 보였다.

(약 2~3km 반경에 모여있다)

 

 

먼저 숙소에서 가까운 Saint Sargis Vicarial Church라는 곳을 찾아가던 중 주위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을 발견한다.

분명 이란을 떠난 지 나흘이 넘어 닷새가 되어가는데, 내가 잘못 본건가 싶어 눈을 비벼본다.

그럴 리 없다.

예레반 도심 한가운데 떡 하니 모스크가 서 있었다.

 

 

이 곳은 카푸이트 모스크라고 하는데 Central Mosque 혹은 Blue Mosque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르메니아에 남아있는 유일한 모스크이며 심지어 1765년에 지은 건물이라고 적혀있었다. 시대적 배경을 떠올려보니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점령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데 분명 그 이후에 소련이 이 곳을 점령했었다. 이 나라는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지 채 30년이 되지 않았으니까.

종교를 억압하던 소비에트 연방이 교회도 아닌 모스크를 남겨두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렇게 나는 천년 가까운 시간 동안 외침에 시달리던 불운의 아르메니아 근대사를 떠올리며 천천히 모스크로 들어간다.

이 안에 답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답을 찾았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복원(Reconstruction) 이란 단어에서 내 모든 궁금증이 해소된다.

 

'그래, 소련이 이 건물을 종교시설로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찾아보니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역사박물관으로 목적을 달리해 쓰였다고 한다.

1996년부터 3년간 이란의 도움을 받아 재건 후 실제로 모스크의 기능을 하고 있는 종교시설이란다.

아르메니아인의 90% 이상의 종교가 아르메니아 정교회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종교의 다름을 인정하고 건물의 본래 목적에 맞게 모스크로 운영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이 멋져 보였다.

비중은 작지만 이 나라 안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 열어두고, 서로 공생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일화에서도 그 나라의 품격이 엿보여서 좋았다.

 

당연히 모스크 안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진 않지만, 아무것도 없는 게 모스크 내부의 특징이다)

이란에서 더 크고 멋진 모스크도 숱하게 봐왔기 때문에, 심지어는 하루에 모스크 열 군데를 방문해 본 적도 있기 때문에 1분 만에 바깥으로 나온다.

별 볼거리는 없지만, 분명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카푸이트 모스크(센트럴 모스크, 블루 모스크).

이번에는 오랫동안 아르메니아와 함께 공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남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이후 Saint Sargis Vicarial Church, Saint Hovhannes Church를 들렀는데, 왜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지 의문이다.

구글맵에도 별표 처리가 되어있고, 일기에도 적혀있는데 백업을 잘못했나 보다.

하지만 이런 교회들은 이란의 모스크처럼, 아르메니아에서 숱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크게 괘념치 않는다.

 

Saint Sargis Vicarial Church를 지나 치체르나카베르드로 가는 길.

도보로 이동한 덕분에 이런 언덕 위의 이국적인 풍경은 볼 수 있어 기분이 마냥 좋은 건 아니고, 힘이 들었다.

 

분명 지도의 축적을 봤을 때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보였는데, 체감 거리는 20k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어제 예레반에 도착한 후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서일까? 

오늘은 오케스트라 공연 전, 아르메니아 현지식으로 성대한 만찬을 즐겨야겠다고 다짐한다.

 

도중에 잠실 경기장만큼 큰 경기장이 보였기 때문에 성큼성큼 걸어가 본다.

hrazdan central stadium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소비에트 연방 시절 가장 큰 경기장이었다고 한다. 무려 1970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잠실 주경기장보다 역사도 더 오래된 셈이다.

 

문이 열려있길래 살짝 들여다본다.

 

사진에선 보이지 않지만, 아르메니아의 국기인 빨강, 파랑, 노랑을 사용해 색칠해둔 좌석이 귀여워 보이는 곳이었다. (파란색은 바로 뒤편에 있다.)

흐라즈단(hrazdan)강 옆에 지어져 이름도 흐라즈단 중앙 경기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작명 센스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진 않다.

 


흐라즈단 경기장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치체르나카베르드에 도착한다.

치체르나카베르드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관인데, 고리스(Goris) 여행기에서 적었던 것처럼 숱하게 침략당해온 아르메니아의 역사 중 19세기~20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 (현 터키) 군대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연구 결과에 따라 다르지만 작게는 20만 명, 많게는 100만 명까지도 학살당했다고 하니, 아르메니아인들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버금가는 조직적 학살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금도 대다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 터키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영화 킬링필드를 보고 찾아갔던 뚜올 슬랭 박물관이 생각났다.

온갖 비참한 사진과 각종 전시물이 걸려있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래 경고 그림이었다.

 

캄보디아 프놈펜 '뚜올슬랭 박물관'의 표지판

 

"웃지 말 것."

 

위에 적힌 캄보디아 글자를 해석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비통함과 참담함을 애잔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던  이 장소에서 웃지 말라고 말하는 그들의 기개와 용기가 멋졌다.

내가 지금껏 봤던 경고 그림, 문구 불문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이다.

 

 

그렇게 숙연한 기분으로 치체르나카베르드를 둘러봤더니 놀랍게도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숙소에 돌아와 발견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도 허탈한 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그만큼 기분이 우울했고, 이들의 아픈 역사가 가여웠으며, 21세기 현재도 작고 가난한 나라란 사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물론 그에 앞서 우리나라의 근대사에도 비슷한 류의 비통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본다.

(일본 뻐큐 머겅, 두 번 머겅)


치체르나카베르드를 지나 동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연인의 공원(Lover's Park)이 나온다.

이름이 예뻐 한껏 기대를 하고 들어가면 아르메니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영어 표지판도 발견할 수 있다.

 

 

연인의 공원(Lover's Park) 지도.

한 바퀴 크게 돌아보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천천히 공원을 걸으며 왜 '연인의 공원'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생각해봤는데,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냥 녹음이 우거진 공원이었다.

혼자서 산책하는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연인들, 소풍 나온 가족들을 쉽사리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원을 여행기에 적은 이유는 단 하나다.

공원 전역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해준다는 점.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며 벤치에 앉아 와이파이를 쓸 수 있다

 

내가 이 곳을 여행할 당시 예레반(Yerevan)에서는 무료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곳이 많지 않았다.

특히 호텔에서도 데이터 용량별 요금을 지불하고 와이파이를 사용했던 이란을 벗어난 직후라, 공원 벤치에 앉아 무료 와이파이를 사용하는 경험이 새로웠었다.

 


아직 오케스트라 공연 시작까지 2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제저녁 아르메니아 예레반 맛집을 찾던 중,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전통 음식인 킨칼리(힝칼리)를 잘한다는 가게를 소개받아 찾아간다.

하기는 예레반에서 방문한 아르메니아 전통 식당 Caucasus Tavern 정보

 

- 상호명 : Caucasus Tavern

- 주소 : 1st Floor, 82 Hanrapetutyan St, Yerevan 0010 아르메니아

- 전화 : +37410561177

 

이 식당의 특이한 점은 1층과 지하로 나뉘어있었는데, 난 종업원에게 지하로 안내받아 자리에 앉는다.

재떨이를 가져다주길래 담배도 폈다.

먼저 생맥주와 오늘의 메인 요리 킨칼리(힝칼리)와 돼지 수육처럼 생긴 메뉴를 보고 주문한다.

 

분명 혼자 왔다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내 앞쪽에 접시와 포크, 나이프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내 가방을 앞자리에 앉혀두고, 가방과 함께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

 

오늘의 주인공 킨칼리(힝칼리)

킨칼리는 코카서스 지방의 전통 음식이라고 하는데, 그냥 봐도 만두처럼 생겼다.

이 코카서스 지방 만두를 먹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위쪽 꼭지를 잡고 입으로 잘 베어 먹으면 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피 안에는 뜨거운 만두소와 육즙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에 저 꼭지를 잡고 그냥 입에 넣으면 파이어 볼을 발사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로 잘 썰어먹었다.

육즙은 핥아먹었다.

 

처음 인도에 방문했을 때, 굳이 커리를 손으로 먹어보겠다며 따라 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분명 서버가 수저와 포크를 줬는데도 그렇게 먹고 있는 나를 보며 인도 현지인들이 웃었던 기억.

 

어차피 배에 들어가면 섞인다.

편한 대로 먹어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이다.

 

그 밖에 이 돼지고기 수육처럼 생긴 요리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간 부위일 수도 있겠다.

맥주 안주로 괜찮은 맛이었다. (딱히 추천할 정도의 맛은 아니다)

 


그렇게 맥주와 곁들인 저녁식사를 마치고, 2달러짜리 오케스트라를 관람하러 간다.

예레반의 국립 오페라 극장은 드레스 코드가 없었다.

나는 인도에서 구입한 짝퉁 크록스를 꺾어 신고 냉장고 바지를 입은 채 한량처럼 입장했는데, 경비원이 나를 쫓아내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페라 극장 내부에 입장하자 환하게 빛나는 천장의 샹들리에가 보였으며, 대리석 타일로 마감한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고급이었기 때문에 '내가 과연 2달러를 내고 이 곳에 들어온 게 맞나?'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설마 여기까지 입장하는데 2달러는 아니겠지'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며 티켓을 봤더니 열과 좌석 번호가 적혀있었다.

분명 난 오케스트라 공연을 관람하러 온 게 맞다.

 

 

어린 시절 록앤롤을 좋아했었고, 락 음악 공연이란 공연은 모두 찾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XX 락페스티벌부터 시작해, 부산 국제 락 페스티티벌, 동두천 락 페스티벌, 지산 락 페스티벌,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모두 찾아갔었다.

유명한 밴드가 내한하면 그 공연도 찾아갔는데, 심지어 군인 시절 휴가를 나와서 까지 메탈리카 내한 공연을 보러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그랬던 내가 샹들리에가 달려있는 오페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감상하게 되다니, 인류 문명사적 일대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2달러 밖에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연에 대한 기대는 0에 수렴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름 모를 아르메니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곡에서 난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한다.

 

내가 구매한 티켓은 밴드와 오케스트라의 크로스 오버였는데, 당연히 연주하는 음악도 자작곡이었다.

(나는 음악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기 때문에, 웬만한 클래식 음악은 귀가 기억한다. 내 자랑이다.)

 

 

공연을 관람하는 도중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아름다운 곡을 들었는데, 제목은 Morning song이었다.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제목을 노트에 휘갈겨 적었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 숙소에 돌아가 한 시간 전 내가 들었던 그 음악을 검색해봤지만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유튜브, 구글 검색에 나오지 않는데,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저 음악을 아는 현인이 계시다면 연락 부탁드린다.

예술의 전당 앞 오프레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할 의향이 있다.

 

 

 

이란을 벗어나 아르메니아에 도착한 지 닷새 째.

난생처음 보는 오케스트라가 소규모 크로스 오버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외려 그 반대다.

2달러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은 티켓을 예매할 때 한 번,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또 한 번. 내게 큰 충격을 줬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르메니아의 크로스 오버 오케스트라 팀이 연주하는 Morning song을 다시 듣는 게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