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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여행기/코카서스(caucase)

(여행기/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독립 기념일에 다시 만난 강연이

by 빛의 예술가 2020. 7. 24.

오늘은 인도에서 헤어졌던 강연이를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다.

녀석과 나는 인도 다즐링에서 한번 스치듯 봤었고(당시에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ABC)을 함께하며 친해진 사이였다. 이후 네팔의 포카라에서 다시 헤어졌었고,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한번, 마날리에서 다시 한번 만났다.

 

이란, 이스파한을 여행할 때 영랑 누나를 만나게 된 계기도 강연이의 소개 덕분이었었다. 그렇게 천천히 돌이켜보니 내 세계 일주의 꽤나 많은 부분을 이 녀석과 함께 했었다.

항상 웃는 얼굴에 씩씩한 모습으로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는 모습이 마냥 부러운 젊은 친구(강연이는 나보다 훨씬 어리다)를 다시 만날 생각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 느지막이 산책을 하며 하루 이틀 전에 비해 훨씬 많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다들 조금씩 들뜬 분위기에 활발히 어디론가 이동했으며, 거리에서는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9월 21일은 아르메니아의 독립 기념일이었다.

독립 기념일에는 공화국 광장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병식(Military parade)이 열린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내가 여행했던 해는 열병식이 열리지 않았다. 

 

 

아르메니아는 총인구 약 300만 명의 작은 나라이다. 천 년 가까이 지속된 외세의 침략에 해외로 망명하거나, 이민 간 사람들이 그곳에 정착해 아르메니아 핏줄을 잇고 있었는데, 그 수가 무려 약 600만 명으로 본국의 인구보다 많은 수준이라고 한다. 그들은 레바논이나 러시아, 미국으로 많이 이동했다고 하며 아르메니아 독립 기념일에는 그 나라에서도 본국의 독립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유태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처럼, 이들도 그렇게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먼 곳에서 이어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열병식이 열리는 대신 공화국 광장에서는 아르메니아 독립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행사 팸플릿을 읽어보니 Countries under same roof festival이란 이름이었다.

아르메니아와 외교적, 경제적으로 긴밀히 협력하고 있는 수 십 개의 나라들의 기업이 모여 일종의 산업 박람회를 여는 행사였다.

 

아쉽지만 우리나라 국기는 없었고, 대신 가까운 나라인 중국 오성홍기가 걸려있었다. KFC와 맥도날드가 없는 나라는 많아도 중국인을 찾아볼 수 없는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총인구 약 300만에, GDP도 세계 하위권이며, 외교력도 그리 뛰어나지 않은 아르메니아인데 중국은 그 시장마저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산업 박람회와 더불어 국가별로 문화행사도 진행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곳, 아르메니아에 여행 왔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 행사를 주의 깊게 관람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전통의상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행사를 진행했는데, 깡충깡충 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 귀여워서 한참을 바라봤다.

아래 동영상을 첨부했다.

 

 

아르메니아 전통 의상

자국의 독립 기념일이 기쁜 건지, 잘 훈련된 무용수들인 건지 몰라도 끊이지 않는 미소를 머금고 계속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그들이 멋져 보였다.

 

아오이 유우 주연의 일본 영화 '훌라 걸스'에 그런 대사가 나온다. 쇠락한 탄광 마을을 하와이 같은 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해 훌라 춤을 배우는 소녀들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춤을 연습하던 그녀들 중 한 명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공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녀에게 무대에 오르라고 말하고, 아버지를 잃은 소녀가 이야기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도 웃으며 춤춰야 하는 건가요?"

 

선생님이 대답한다.

 

"그게 프로의 모습이다."

 

웃으며 전통춤을 추는 저 사람들도 각각의 사정이 있겠지. 모두가 마냥 행복해서 웃으며 춤추는 건 아닐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강연이와 약속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인 Vernissage market으로 향한다.


 

점심 즈음에 강연이와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녀석은 여행 도중 여자 친구를 만들었는데, 오늘 내게 소개해주겠다며 함께 데리고 온 것이다.

여자 친구는 가족과 함께 아르메니아를 여행 중이었는데, '가족 여행 중에서도 타인과의 사랑이 싹트는구나' 혼자 생각하며 웃는다.

 

오랜만에 만난 강연이와 그의 여자친구

 

Vernissage Market은 예레반의 수공예 벼룩시장 같은 곳이었는데, 주얼리나 중고 서적, 시계나 각종 잡화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난 세계일주를 시작한 이래 두 달만에 가지고 간 옷가지나 짐들을 버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물건들을 구입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기자기하게 진열된 잡화들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주었다.

 

 

강연이는 나와 인도에서 헤어진 후 이집트를 여행했다고 한다.

이집트 다합에서 스킨 스쿠버를 했다고 하며,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하고, 조지아를 넘어 이 곳 아르메니아로 온 것이다.

(녀석과는 이후 조지아와 터키에서 잠깐씩 다시 만나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

 

사실 케밥으로 가장 유명한 나라는 터키인데, 녀석은 터키 케밥과 이 곳 케밥의 맛을 비교해보고 싶다며 하나 주문해서 여자 친구와 나눠먹는다.

나는 이란에서 질릴 정도로 케밥을 먹었기 때문에 사양하고 고향의 맛 KFC에서 치킨을 먹는다.

 

 

이후 우리는 예레반 야외 박물관(Cascade complex) 주변을 산책하고, 희귀 고문서 전시관인 마테나다란(Matenadaran)에 가보기로 한다.

천천히 걸어가며 내일은 당일 여행으로 세반 호수(Sevan lake)에 가기로 했는데, 천천히 계획을 짜며 웃고 떠들며 걸으니 기분이 한껏 고조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마테나다란(Matenadaran)은 1959년에 지어진 희귀 고문서 보관소라고 하는데, 5세기경 아르메니아 36개 알파벳이 개발된 후 주로 중세시대 신학 관련 책과 문서가 많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라고 한다.

 

예레반 야외정원(Cascade complex)에서 약 2~3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쉽게 걸어갈 수 있다.

 

멀리서 마테나다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계단을 오르면 대형의 석상이 보인다.

그 석상 앞에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대형 석상을 바라보는 작은 석상이 보이길래, '예수의 모습을 형상화한 건가?'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처럼, 아르메니아의 알파벳을 만든 Mesrop Mashtots의 석상이라고 한다.

 

Matenadaran, Mesrop Mashtots

 

아르메니아 문자를 발명한 Mesrop Mashtots 석상은 정면에서 바라봐도 멋지지만, 더 드라마티컬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마테나다란의 입구로 한층 올라가 석상을 위에서 바라보면 아르메니아 인들이 Mesrop Mashtots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시각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Stone statue of Mesrop Mashtots

 

Matenadaran

 

마테나다란을 돌아본 후 예레반 시내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면 또 다른 장관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아르메니아 오페라 극장까지  곧게 뻗은 길은 Mesrop Mashtots Ave.인데, 그제야 도로명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광화문 광장에서 서울역까지 포장된 도로가 세종대로인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인물에게 도로 이름을 헌정하고 있었다.

 

Mesrop Mashtots Ave


저녁식사 후 강연이는 내가 묶는 Center Hostel에 체크인을 했으며, 여자 친구의 게스트하우스에 함께 놀러 가기로 했다.

부모님과 함께 여행 중인 그녀는 내가 왔던 반대 루트로 이동해 이란 여행을 할 것이라고 했는데, 아르메니아-이란 국경을 넘는 방법을 부모님께 알려달라고 했다.

쉬운 일이었다.

정확하게 내가 일주일 전, 왔던 길을 반대로 이야기하면 되는 거니까.

 

부모님이 외출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 셋은 야외 테이블에서 아르메니아 산 와인을 홀짝거리고 거리고 있었는데, 날씨가 조금 추웠다.

내 눈 앞의 커플들은 담요를 한 장 들고 와서 나란히 덮고 염장질, 아니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부러워 숙소로 돌아갈 뻔했다.

그러던 중 스웨덴에서 왔다는 남자들이 보드카를 들고 우리 자리에 합석한다.

 

우린 여행자들이 흔히 하는, 어디서 왔느냐, 어디를 여행했느냐, 어디를 갈 것이냐는 진부한 질문과 대답을 하던 중 스웨덴 남자는 한국에서 왔다는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North or South? (남쪽? 북쪽?)"

 

여행을 하며 백만 번 가까이 들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North(북한)'에서 왔다고 농담 삼아 답변을 해본다.

강연이와 여자 친구는 깔깔거리기 시작했지만, 그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당신들 나라에 가본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 와봤겠지ㅋㅋ 그런데 북쪽에서 왔다는 건 거짓말이야. 우린 남한 사람들이야."

 

사실대로 이야기하며 웃었지만, 스웨덴 남자가 하는 답변이 놀라웠다.

 

"난 South Korea에 가본 적 없는데?"

 

 

남자는 정말로 '북한'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네가 무슨 외교관이라도 되느냐는 내 질문에, 그렇지 않고 우리는 북한을 여행할 수 있다고 답변한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북한의 비자, 스탬프까지 보여준다.

난생처음 보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비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가 놀라웠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우리 질문에 남자는 흔쾌히 OK라고 답했다.

 

북한 비자(사증)

어디선가 그런 얘길 들었었다.

특별한 국제적 이슈가 없을 때, 다시 말해 나름의 평화 모드가 지속될 때는 북한을 정식으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대상국이, 지구 상 몇 남지 않은 공산국가인 쿠바나 베트남, 라오스, 중국 정도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스웨덴 남자는 북한을 가보지 못했다는(정확하게는 갈 수 없는) 우리에게 토끼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희는 같은 한국 아니야? 왜 왕래하지 못하는 거야?"

 

 

일제의 침탈, 임시정부 수립, 미국과 소련의 냉전, 한국전쟁에서부터, 왜 남북이 분단되었고 왕래할 수 없는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해본다.

거기서부터는 고등학생 수준의 영어가 필요하다.

 

내 영어 수준은 고작 중학생 수준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설명하진 못했다.

그리고 그 정확하지 못한 설명에 대한 답답함은 숙소로 돌아간 이후에도 내 머릿속에 화두처럼 맴돌았다.

핸드폰으로 북한 여행 사진을 보여 준 스웨덴 남자

 

 


아르메니아의 독립 기념일, 스웨덴 남자를 만나 생각하게 된 우리나라의 독립과 냉전, 그리고 분단, 남과 북.

그것들은 서로 어지럽게 흐트러진 퍼즐처럼 잠들기 전까지 나를 괴롭혔다.

 

정답은 찾을 수 없었다.

정작 가장 가까운 위치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한과 북한은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정치인들은 이를 무기로 이념전쟁 중이며, 신문과 방송이 그 편을 든다. 다수의 국민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있으며, 이 사이클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아마 이대로라면 죽기 전, 내 여권에 북한의 비자(사증)가 찍히는 일은 없을게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생각난 여행할 수 없는 나라의 존재에 마음이 아파왔으며, 오늘 만난 스웨덴 남자가 마냥 부러웠다.

 

 

우리도 언젠가 북한을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고대하며 하루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