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226 (20090705)Flower by Kenzo 깊은 어둠을 사르며 해가 뜨고, 차가웠던 공기가 서서히 데워지며 달이 희미해질 때, 내가 잠에서 깨어나 심호흡을 하며 생각하는 것은, 오늘 해야할 일 따위나 물을 마셔야겠다는 상상, 며칠 후에 있을 시험, 아침으로 먹을 메뉴를 생각하거나, 핸드폰따위를 뒤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숨통이 끊어져있는 엠피쓰리 플레이어의 전원을 켜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후 음악을 재생하는 일이었고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너무도 애절하여 잠에서 깨자마자 엉엉 울었으며 희미하게 향을 발하는 책상 위의 방향제 탓에 가벼운 기침을 했고, 상하로 천천히 움직이는 에어콘디셔너를 멍청히 쳐다보고있을 뿐이었지만 바깥에서 살랑살랑 부는 청아한 바람을 잊고있었던 것은 아니며 옆에서 잠든 룸메이트의 파워서플라이어가 작동하는 진동까지 느끼고 천천.. 2013. 4. 16. (20090630)흑백 언제부턴가 흰 네모판이 두려워지기 시작하였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봐도 네모판은 네모판일 뿐, 둥그런 원 따위나 세모가 될 수 없기 때문이오. 사실 외형적인 특질을 고찰하는데 그치지 않고, 몇 걸음 진일보하여 네모판을 바라본 적이 있소. 거기서 얻었던 지혜는 아무것도 없었소. 단지 네모판이 희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오. 만약 '이 네모판이 검은 색이었다면' 하고 생각해볼 때가 있소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더 이상 이 네모판은 흰 네모판이 아닌게 되어버리오. 검은 네모판은 흰 네모판이 될 수 없기 때문이오. 하지만 흰 네모판은 검은 네모판이 될 수 있소. 흑(黑)과 백(白)은 하나이지만, 백(白)과 흑(黑)은 둘이기 때문이오. 그런 단순한 이치와 섭리로 당신과 지구가 공전하는 것이오. .. 2013. 4. 16. (20090523)Pretend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뒤이어 남자손님이 들어온다. 두 사람은 머뭇거리더니 바 탑에 앉는다. 난 직접 주조한 깔루아 밀크를 홀짝이며 그들을 응시한다. 바 탑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불륜이다. 깔루아 밀크를 마시는 내 눈에는 그 것이 보인다. 코웃음치며 메뉴판을 들고 그들 앞으로 다가간다. 남자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무시하고 여자를 바라본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가설 성립. "주문하시겠습니까?" "맥주 3병 가져와" 기본은 되어있다. 심화학습이 필요한 손님이다. "어떤 맥주로 가져다드릴까요?" "아무거나" 깔루아밀크를 마신 직후이기 때문에 하이네켄를 선택한다. 하이네켄 3병을 가져다주자 남자가 손으로 마개를 돌려따려한다. 제지해야한다. "손님, 하이네켄은 트위스트 캡이 아닙니다." 오프.. 2013. 4. 16. (20090517)루벤스 고등학교 시절에는 루벤스란 화가를 좋아했다. 한 폭의 그림으로 대중을 압도시킬 수 있는 능력이 부러웠다. 섬세한 묘사가 부러웠고, 과감한 표현이 부러웠다. 그 당시 그의 그림은 온통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지나 피터 폴 루벤스에게 받은 충격이 서서히 희석되어갈 즈음 그런 생각을 했다. '비가 쏟아지는 날, 우산을 대신해 피터 폴 루벤스의 유화를 머리에 이고 비를 피해 달려간다면 그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비를 맞아도 유화는 지워지지 않을테니까. 만에 하나, 그림이 지워진다 하더라도 그의 그림은, 내 기억속에 조금도 퇴색되지 아니한 채 남아있을 것이므로. 2013. 4. 16. (20090513)나의 소멸에 대한 단상 예전 내 심장을 뛰게 만들던 것들은 모두 죽었다. 땀에 범벅이된 시뻘건 열정이 난무하던 그 공간이며 타르와 알콜에 찌든 우리들만의 연습실 매번 내 동공을 32%정도 확장시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던 다리가 가는 여자애와 멸공만이 조국통일의 지름길이라고 핏대높여 말하던 그 남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침까지 흘리며 들었던 흑인도 백인도 아닌 그의 음악 무전여행 중 처음 보는 사람과 만나 잠자리를 구걸하던 객기 도로 한 복판에서 버스를 세울 수 있던 용기 눈물이 멈추지 않아, 탈수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그 소설 만취한 상태로 길을 걷다 쿵하고 넘어져 찔끔찔끔 쏟아내던 알콜 맛이 나던 피 하늘만 바라보며 핸들을 돌리고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던 운전술 눈 앞에서 순식간에 소멸해버린 U.. 2013. 4. 16. (20090426)save our smiles 마음이 편하지 않다. 잘 만든 가면은 태초부터 내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나와 함께 호흡한다. 마치 무라카미 류의 공생충처럼 뗄 수 없다. 가면이 말한다. 빌어먹을 세상의 작태를 관조하는 자세가 필요해. 네가 반드시 참여할 필요는 없어. 네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화염병을 던질 준비는 되어있으니, 어줍잖게 앞에서 사람들을 선동하지 마.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비논리적인 것에 더 쉽게 설득당한다. 가면은 그 사실을 간파한다. 토끼의 귀를 절단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지. 하지만 오가며 네가 밟은 수천마리의 개미는 안중에도 없어. 예를 들어 전자기타를 연주하다 줄이 끊어진다면 넌 슬퍼하겠지. 하지만 통기타를 연주하다 줄이 끊어진다면 슬퍼해선 안돼.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볼까? 네가 웃고.. 2013. 4. 16.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