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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잡문(旅行雜文)44

여행의 일상화에 대한 경계 계획 짜는 일을 했었다. 2년 정도 그 일을 반복하고 있자니 계획에 관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세상에 계획대로 굴러가는 일은 전무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일을 완수하기 위해선 계획이란게 꼭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역설이었다. 그리고 난 그 거대한 역설에 사로잡혀 사고능력을 박탈당한 로봇처럼 계획을 수립하고 또 변경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난 이번 세계일주를 위해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남들은 35박 36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나도 "여행 계획서"따위의 거창한 제목의 문서를 인쇄해서 들고 다니던데, 난 그런 것도 없다. 계획이란게 있다면 이게 전부였다. "일단 방콕 공항에 떨어지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반 시계 방향으로 돌고 서쪽으로 가되, 되도록 육로로, 아프리카는 북에서 남으로, 남미도.. 2013. 11. 13.
열정과 삶에 관한 잡설 창을 열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무언가 보이겠지'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일주일이 될 때 까지 난 매일 창을 열었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열정이란게 꼭 필요한걸까? 그 때 내게 물어봤었다. '열정이란게 삶에 꼭 필요한 요소일까?'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열정'의 범위를 어디에 국한해야 하는지가 논리적 사고의 확장이었다. 하지만 난 어떤 조건도 무시한 채 한 문장의 명제에만 모든 신경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난 안개와 비가 흩날리던 그 도시에서 깨닫는다. 일 주일간 비가 내리고, 그치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다시 비가 내리기를 반복하는 우기의 다즐링에서 말이다. '열정같은건 삶에 꼭 필요한 게 아니다. 삶에 꼭 필요한 것은 햇빛과 물이다. 열정이고 잡지랄이고 빛이.. 2013. 11. 11.
발주악벽(發走惡癖) 에게해가 치감아 돌고 있는 그 낯선 항구 도시에서 녀석들을 만난다.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말 두필. 발주악벽(發走惡癖)이라도 있을까? 해변을 끼고 돌기만 할 녀석들에게 눈가리개는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녀석들을 관찰하던 중 당신들이 생각났다. 당신들 말이지, 지금 눈가리개까지 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중인 당신들 말야. 지금 그 눈가리개를 벗으면 아름다운 바다가 옆에서 펼쳐질 거라는 건 알고 있어? 당신들에게 발주악벽은 악벽이 아니야. 진입불량, 발주 고착, 돌출, 모조리 지금의 당신에게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두 발로 대지를 지탱하고 서서 어디든지 몸으로 부딪히며 세상, 나아가 자아를 깨닫는 일이지 앞만 보고 달리기 위해 눈가리개를 쓰고 달릴 준비를 하는게.. 2013. 11. 9.
마케도니아 국기와 축제 마케도니아에 도착했다. 불가리아 사람들 보다 잘 웃으며, 예상외로 따듯와 날씨에 깔끔하게 정비된 도로를 보며 생긋생긋 웃던 찰나 그 것을 발견하고 내 인상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다. 마케도니아 국기였다. 그래, 욱일승천기를 빼닮은 국기를 어느 나라에선가 사용한다고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게 이 나라였구나.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지만 어디를 가도 욱일승천기를 쏙 빼닮은 자국기가 펄럭이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Skopje)에서 난 봉화제를 떠올렸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일제 극우 세력의 침략을 정당화하며 그 아래 빌붙어 성장한 친일 세력이 득세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록과 소설에 의존해 시대를 조명해 보자면 한민족이 한반도(혹은 대륙)에 기틀을 잡은 지 반 만년 이래 가장 처참했던 시.. 2013. 11. 6.
변검술 중국(中国) 사천성(四川城)의 성도 청두(成都)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조금은 추운 날씨에 몸을 웅크린 채 수많은 인파 속을 쏘다니고 있을 무렵 변검술 공연이 열린다는 전단지를 발견했다. 그렇게 중국의 외딴 곳에서 관람했던 변검술은 참 신기했었다. 어쩜 그렇게 빨리 얼굴의 가면을 바꿔치기 할 수 있는지 그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뚫어져라 가면을 쳐다봤지만 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마술사의 트릭(trick)을 알아내기 위해 영롱하게 빛발하던 시선이 결국 잿빛처럼 변해 버리듯. 난 나풀거리는 기괴한 복장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고, 공연자의 날렵한 몸 놀림을 따라가기에도 벅찼던 것이다. 마지막은 공연자가 모든 가면을 벗어버린 채 맨 얼굴을 드러냈다. 공연자는 당연히 남자였고, 의외로 앳되보이는 얼굴이 인상.. 2013. 11. 4.
India's same. not changing. 숙소가 더럽기로 유명하다는 인도(India)에 도착했다. 그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콜카타(Kolkata)에 도착한 첫 날 짐을 풀고 침대에 돗자리를 펼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조금의 가감없이 내가 체크인한 호텔의 침대는 바닥보다 더러워 보였다. 10년 전 쯤에는 흰색으로 빛 발했을 시트는 누렇다 못해 검은 빛으로 변색되고 있었으며, 푹 꺼진 베개에는 내 머리를 뉘이는 즉시 환호성을 지를 벼룩이나 이 따위가 득실댈 것만 같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무더운 날씨 덕분에 내 침낭은 꺼내지 않아도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내 소지품으로 적당히 침구를 정리한 후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샤워실 확인이 두 번째였다. 날씨가 더워 더러운 침대 위에 침낭을 펼치지 않아도 되는 대신, 샤워는 자주 해야 했기 때문.. 2013.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