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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226

(20100903)밤의 세계 그 곳은 밤의 세계였다. 친구들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며 걱정했지만, 난 생각이 달랐다. 이 세상은 존재론적 증명을 논증해야만 하는 곳이니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신을 증명한 것처럼 말이다. 지구의 회전축이 빙글돌아 암운에 서광이 비춰올 때면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고, 적요한 어둠에 별 빛이 반짝이면 그 곳으로 향한다. 심플하고 정교했다. 난 그런 류의 단순함을 좋아한다. 어느 정도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갈 때는 밤의 세계에서 일하는 동료들과 함께였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만, 그 누구도 먼저 아는 체 하지 않는다. 그 것이 룰이었다. 희미하게 지워져가는 짙은 립스틱을 한 여자와 쉬폰 원피스의 어깨팍에 얼룩이 묻은 여자 발 뒤꿈치가 갈라져 밴드를 붙이.. 2013. 4. 16.
(20100808)장거리 연애를 하는 그대에게 눈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아닌지요. 2013. 4. 16.
(20100724)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말하는 고독 며칠간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읽었다. 어느 날에는 방에 틀어박혀 책장을 넘겼으며 어느 날에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장을 넘겼다. 사랑을 하게되면 극한의 고독을 느낄 수 있다는 어떤 가수의 말처럼 좌에서 우로 활자를 쫒는 내 눈에는 고독이 묻어났다. 바람이 불어 계절이 변화하듯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마다 고독은 그 농도와 깊이를 천천히 더해갔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읽는 책은 일품이었다. 내가 써갈겨대는 이 문장을 글이라 말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나의 글은 태반이 암호로 이루어져있으며, 해석할 수록 복잡해지는 미노타우로스 신화 속 크레타 미궁을 닮아있다. 자연스럽게 나의 암호화된 글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람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당연히 나는 그런 사람들을 분간.. 2013. 4. 16.
(20100703)서큐버스 신드롬 프린스의 음악을 들으며 잠들면 항상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물론 기묘한 일이 아닌 기묘한 꿈인지도 모른다. 어제도 프린스의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했다. 맥주를 두 병정도 마신 채 몽롱한 정신이었지만 쉽사리 잠이 들진 않았다. 그러던 중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난 분명 프린스의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음악이 미카의 것으로 바뀐 것이다. Lollipop 프린스가 제 정신인 이상 미카의 음악을 자신의 앨범에 삽입할 리가 없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Happy ending까지 울려퍼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날개가 솟아오른다. 내 동공은 선홍빛으로 변화하고 입술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검은색의 날개는 활짝 펼쳐져 천장에 닿을 기세다. '내가 눈화장을 지우지 않았던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라인은 검었고 거울을 자세히.. 2013. 4. 16.
(20100626)에리히프롬과 데오드란트 세번째 이번학기는 입에 불평 불만을 달고 살았지만 그 정도의 부피만큼 인생의 즐거움을 느꼈던 학기다. 먼저 당신을 만난 것 자체만으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스스로 지식노동자를 자처하고 철학과 사회학, 기호학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인류학를 넘나드는 지식을 내뿜는 당신의 기개에 놀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배운 가장 큰 개념은 라깡이나 부르디외, 허버트 마르쿠제등의 사람이 아니라, '타자'라는 개념이었다. 모든 철학에 존재하는 타자라는 개념은 자신을 알아가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역설했다. 물론 소크라테스적 '지기(知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삼라만상은 피아로 구분되며 아(我)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피였다. 그리고 당신의 그 모습에 반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철학적 바탕의 혼잡한 개념.. 2013. 4. 16.
(20100624)에리히프롬과 데오드란트 두번째 사람이 꽤나 많았다. 어제는 파워워킹을 하던 여학생 삼총사, 홀로 질주를 하던 남학생 손을 꼭 잡고 걷던 커플 한쌍 배가 조금 나온 50대 아저씨 한 분 두명이서 업치락 뒤치락 사이좋게 뛰며 역겨운 냄새를 풍기던 두 명의 남학생 그리고 나 도합 10명의 사람이 운동장을 뛰었는데 오늘은 그 보다 많았다. 숙면을 취하지 못해 조금은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트랙위에 멈춰선다. Kiss의 1978년 발매된 앨범 Ace Frehley의 6번 트랙인 New york Groove의 웅장한 베이스에 맞춰 질주를 시작한다. 당시 난 어렸고 사랑을 알 리가 만무했다. 선물을 주고, (내 주관에 따른)사랑스런 눈빛을 보내고, (상대의 속마음을 헤아리진 않았지만)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여겼었다. 그와.. 2013. 4. 16.